“장화 신고 들어가서 구두 신고 나온다.”
신도시와 관련된 부동산 투자자들 사이의 오랜 격언이다. 2003년 첫발을 뗀 뒤 ‘미분양의 무덤’이라 불리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기 신도시조차 결과적으로 수도권 수요자들을 끌어모으며 시장에 안착한 지 오래다.
1990년대 초 노태우 전 대통령의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1기신도시)을 필두로 수도권의 대규모 택지사업은 서울 집값 상승을 잠재우는 방편으로 급하게 추진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첫 입주자들이 교통 및 생활인프라 부족에 불편을 겪는 일이 흔했다. 주택청약을 통해 입주 2~3년 전 물량을 미리 내놓아 ‘포모(FOMO, 소외공포)’에 빠진 수요층을 진정시키고 시장에 “상승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주려는 것이다.서울 집값이 고공행진하던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급히 내놓은 3기신도시 계획이 새 정부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세가 서울 전역으로 확산했던 데다 곧 닥칠 ‘공급 절벽’으로 인해 지켜보는 정부와 수요자들의 불안감이 높아진 상태다.
이재명 대통령은 7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도시를 자꾸 새로 만들면 수도권 집중이 더 심화된다”며 “기존에 계획된 신도시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공급이 실제로 안 되고 있으니 속도를 빨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4기신도시 대신 기존에 추진 중이던 3기신도시를 비롯한 공공택지사업을 신속히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당장 선도지구조차 정비계획 수립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1기신도시 재건축을 통한 빠른 공급은 어렵다. 마침 올해를 기점으로 3기신도시 본청약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상당수 신도시의 토지보상이 마무리에 접어들면서 3기신도시 주택공급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문제는 물량이다. 국토교통부가 올해 업무계획을 통해 발표한 3기신도시 본청약 공급가구 수는 8000호로 이를 비롯한 공공분양 물량은 약 2만8000호 정도다. 3기신도시 계획물량이 18만 호, 신규 택지지구 전체가 30만 호 정도라는 점에서 여전히 공급 속도는 늦은 편이다. 일각에선 “연간 10만 호 정도는 공급돼야 집값이 확실히 잡힌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새 정부가 신도시 밀도 상향, 보상금 확대 등을 통해 공급물량을 늘리는 데 고삐를 당길 것으로 보고 있다.
2기신도시 보완한 입지·인프라
3기신도시 중 경기도 고양 창릉신도시에선 첫마을 3개 단지가 지난 2월 일제히 본청약에 나섰다. A4, S5, S6 3개 블록, 총 1792가구 규모였다. 일반분양 610호 입주자 모집에 무려 3만2451건 신청이 접수되며 평균 53대 1 경쟁률을 기록했다.
원래 일반분양은 237가구였으나 사전청약에 당첨된 1401명 중 1028명(73%)만이 본청약을 신청하면서 373가구가 일반공급 물량으로 나왔다. 3년 전 사전청약 당시 추정치보다 분양가격이 1억원가량 올랐기 때문이다.
공공분양인 S5블록의 전용면적 59㎡ 타입 공급가격은 5억5000만원이었는데 인근 시세보다 1억~2억원 저렴하게 나왔다. 게다가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 정차역과 가깝고 서울 접근성이 높아 인기를 끌었다.서울 송파구와 인접한 하남 교산신도시에서 본청약을 진행한 ‘교산푸르지오더퍼스트’는 201가구 모집에 5만2920명이 몰리며 263대 1 경쟁률이 나왔다.
박지민 월용청약연구소 대표는 “3기신도시는 서울과 가까운 입지나 철도개발 계획을 고려할 때 실수요자들이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곳”이라며 “고양 창릉과 하남 교산 본청약의 경우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나와 더욱 인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고양 창릉과 하남 교산은 광명 시흥과 함께 서울과 인접한 최고 입지의 3기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3기신도시는 2018년 12월 발표된 남양주 왕숙, 하남 교산, 인천 계양을 시작으로 이듬해 고양 창릉, 부천 대장이 추가 지정됐고 2021년 광명 시흥까지 이어진다.
이들 공공주택지구는 2기신도시의 단점을 보완한 특징을 보인다. 판교, 위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서울에서 30km 떨어진 2기신도시는 입주 초기부터 교통이 아킬레스건으로 꼽혔다. 1기신도시가 서울의 ‘베드타운’에 그쳤다는 지적에 따라 ‘자족도시’를 표방했지만 신도시 특성상 여전히 서울로 출퇴근하는 주민이 많았다. 여기에 개발 초기 인프라 부족 문제와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침체까지 겹치며 대규모 미분양이 발생하기도 했다.3기신도시는 2기신도시, 심지어는 1기신도시보다도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며 택지개발과 함께 철도계획까지 마련됐다. 고양 창릉(GTX-A)과 남양주 왕숙(GTX-B), 인천 계양·부천 대장(GTX-D)이 GTX 정차역 일대에 자리하며 하남 교산은 3호선 하남연장선이 지난다. 광명 시흥은 광명시흥선 경전철의 사전타당성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졸속 대책’ 오명 씻을까
이 때문에 일산, 파주 등 일부 1기와 2기신도시 주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기존 신도시는 수십 년째 불편한 대중교통으로 불편을 겪으면서도 인근에 지속적으로 주택이 공급되면서 더욱 심한 교통난에 시달려왔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그만큼 수도권 주택 수요자에게 3기신도시는 입지와 교통망을 다 갖춘 매력적인 공급처이기도 하다. 서울과 멀고 미분양이 심했던 평택, 검단도 수도권 공급 부족이 심화하고 교통망 등 주변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결국 집값이 올랐다.
다만 2기신도시 당시와 마찬가지로 서울 아파트 가격 급등에 따라 추진된 계획인 만큼 3기신도시 사업은 여전히 ‘졸속 대책’이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업 추진 초기부터 전문가들이 지적한 대로 오랜 토지보상 등의 절차에 따라 사업일정은 수년간 지연됐다. 2019년 지구지정이 시작될 당시 3기신도시 사업은 올해부터 입주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업은 미뤄졌고 수도권 실수요를 흡수하기 위해 2021년부터 진행된 사전청약은 현재까지 총 15개 단지가 표류하는 등 정책의 신뢰성을 잃었다. 올해만 8개 단지가 본청약을 하지 못하고 사업이 취소됐다.다행히 지구 지정이 늦은 광명 시흥 외에 3기신도시와 과천지구 등 다른 택지지구 상당수는 보상을 마친 상태로 지상물 철거 작업 등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풀린 보상금 규모만 2조4000억원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들어 본청약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부는 이들 지역의 기업과 군부대 이전도 서두르는 등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존 신도시보다 녹지비율이 높고 밀집도가 낮게 계획된 3기신도시 특성상 도시 밀도를 높여 공급 가구수를 대폭 늘리는 방향도 검토 중이다.
한문도 서울사이버대 겸임교수는 “이미 보상이 끝난 곳이 많아 주택공급을 본격화할 수 있는 타이밍”이라며 “국토교통부 장관이 임명되면 신속하게 대규모 공급계획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그럼에도 우려는 남는다. 3기신도시 정책의 신뢰성을 훼손한 사전청약 취소 사례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와 공사비 상승이 맞물려 발생한 결과이다. 공공택지사업 특성상 저렴한 분양가가 책정돼야 하지만 사업비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남양주 왕숙 A2블록 사업비는 3년 전 사전청약 당시 2152억원보다 2911억원으로 35.3% 상승했다. 저렴하고 신속한 공급이 가능하려면 민간 사업자 또는 한국주택토지공사(LH) 등 개발공사가 손실을 봐야 하는 구조다.
분양가가 올라갈수록 잔금 대출 부담도 커지지만 최근 정부는 일반 주택담보대출뿐 아니라 정책대출의 문턱까지 높인 상태다. 정부는 6·27 대책을 통해 디딤돌 등 정책대출 한도를 1억원씩 낮췄다. 사전청약 당첨자뿐 아니라 일반분양을 노리던 잠재 수요의 이탈이 생길 수 있다.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전 국회의원)는 “최근 정부가 정책대출까지 조이게 된 원인이 단순 가계대출 관리 차원만은 아니고 주택기금이 고갈되고 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며 “실수요자들의 내 집 마련을 돕는 차원에서 금융지원이 부족한 것이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