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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 원화 약세 언제까지...

‘달러가 약한데 원화는 더 약하다. 국제 통화 시장에서 원화는 외톨이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의 평가다. 그의 말대로 원화는 전 세계 주요 국가 중 가장 힘이 없는 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는 국제결제은행(BIS)이 산출하는 실질실효환율지수로 알 수 있다. 실질실효환율은 수출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가 변동이나 교역 비중 등을 반영한다. 통화의 실질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활용된다. 실질실효환율지수가 100 이상이면 기준 시점 대비 주요 교역 상대국 통화에 대한 자국 통화가 고평가됐다는 뜻이다. 반대로 100 이하면 저평가다. 실질실효환율이 하락했다는 것은 해당 국가 통화의 구매력이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지난 3월 한국 원화는 94.8로 기준선인 100보다 낮아 조사 대상 64개국 중 60위로 바닥권이었다. 원화의 실질실효환율지수는 2021년 8월 이후 100을 밑돌았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었던 지난해 10월에는 90.7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올해 1월 98.3까지 회복되는 듯했으나 다시 하락세로 전환됐다. 4월 수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4월 원달러 환율이 1340원 수준까지 오른 것을 감안하면 실질실효환율지수는 추가 하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달러 환율은 1338.5원(5월 17일 기준)으로 지난 2월 2일 기록했던 1227원과 비교해 8% 넘게 원화 가치가 떨어졌다.

 

원화 가치가 낮으면 수입물가는 오른다. 국제유가가 많이 내렸는데도 환율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지난 3월 달러화 기준 한국 수입물가는 1.8% 떨어졌다. 하지만 원화 기준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0.8% 상승했다. 이 때문에 물가 안정을 위해서라도 원화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원화 약세는 달러화 대비로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유로화, 파운드화, 엔화 등 주요 통화 대비로도 약세가 두드러진다. 1유로화당 원화는 1449원(5월 17일 기준)으로, 2014년 3월 이후 10년 2개월래 최고 수준이다. 파운드화당 원화 역시 1669원으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있었던 2016년 6월 이후 가장 약세다. 100엔당 원화는 2월 초까지만 해도 930원 수준이었으나 지난해 3월 이후 1000원을 재돌파했다. 위안화 대비로도 원화는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약한 수준이다.

원달러 환율

실질실효환율은 꼴찌 수준

유뢰엔.위안 대비로도 약해

권아민 이코노미스트는 “연초 이후 미국 달러화가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원화도 같이 힘을 잃었다”고 했다.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신흥 통화와 비교해 약세폭이 두드러진다는 의미에서 ‘외톨이’라는 설명이다.

 

일단 신흥국으로의 달러 공급이 줄었다는 점은 아시아권 통화 전체의 약세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중반 ‘약달러’ 국면에서는 미국 소비 증가(경상수지 적자 확대)와 맞물려 달러가 신흥국으로 대거 유입됐다. 그러나 최근 미·중 갈등 속에서 중국 경제 성장세마저 주춤하며 신흥국에 들어오는 달러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게 권아민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다. 달러를 구하기 위해 신흥국 통화가 많이 필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약세 현상이 나타났다는 진단이다.

 

이뿐 아니다. 한국 원화가 ‘외톨이’ 취급받는 핵심 이유로 수출 정체가 꼽힌다. 글로벌 수출 규모 대비 한국 비중이 정점을 찍었다는 분석이 나오며 원화 가치가 하락한 것. 2017년 이후로 무역수지와 원화 가치 간 상관계수가 0.86으로 더 높아져 ‘무역 악화=원화 가치 하락’의 공식이 더 공고해졌다. 국내 무역수지는 2022년 3월 이후 14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수출 중에서도 대중 수출 부진을 원화 약세의 주요 원인으로 언급했다. 그는 ‘또다시 중국 늪에 빠진 원화’라는 보고서를 통해 “지난 5월 1~10일 수출입 현황에서 대중 수출이 뚜렷한 반등 기미를 찾지 못했다”며 “대중 무역수지를 포함한 전체 무역수지 적자 현상이 원화 약세폭을 키웠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급 측면에서는 내국인의 해외 투자가 늘어나고 외국인의 국내 주식 시장 투자가 줄었다는 점이 원화 약세 이유로 꼽힌다. 미국의 지지부진한 부채 한도 협상, 중국의 느린 경기 회복, 글로벌 물가 상승 우려 확대 등의 ‘거시 경제’ 요인도 원화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송민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흥국은 자국 통화 표시 채무로 달러를 조달하기 힘든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며 “국제 금융 여건이 악화할 경우 외국인 자금이 급격하게 유출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수출 부진에 달러는 유출

1300원대 박스권 갇히나

다만 지난해 달러당 1500원에 달했던 ‘킹달러’가 재현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대체적인 견해는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로 굳어지며 당분간 박스권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만 일부 전문가는 하반기 1200원대 진입을 예상한다. 전규연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단기적인 통화 정책과 중장기적인 패권 전쟁 관점에서 달러는 약세로 흘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내외금리차, 대외 무역수지 적자, 금융 불안 등으로 원화가 다른 통화 대비 가치가 과도하게 낮아졌지만 주요 악재가 선반영됐다”며 “2분기부터 무역수지 적자폭이 개선되며 원화 약세 흐름이 돌아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전망치는 3분기 1280원, 4분기 1250원 내외다. 박상현 애널리스트 역시 “3분기부터 수출 경기 개선과 무역수지 흑자전환이 예상된다”며 “한미 간 정책금리 역전폭 확대 리스크 해소에 힘입어 연말 1200원 중반을 전망한다”고 밝혔다.

 

외환 수급 관점에서 분석했을 때 원화 약세가 반전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미 외국계 은행의 선물환 포지션(잠깐용어 참조) 한도는 2010년 규제 도입 이후 가장 높은 250% 수준이다. 금융당국은 2016년 미국 긴축과 2020년 코로나19로 원화 가치가 급락할 때 시장 안정 조치 차원에서 은행권의 선물환 포지션 한도를 늘리는 조치를 취해왔다. 권아민 이코노미스트는 “선물환 포지션 한도를 높이면 외환스왑 시장에 공급할 수 있는 외화 규모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며 “이를 고려하면 1200원대 환율 진입도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선물환 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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