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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별세

2001년 3월21일 정주영 회장이 눈을 감았다.
2001년 3월21일 정주영 회장이 눈을 감았다. 사진은 집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정주영 회장.

 

2001년 3월21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사망했다. 향년 85세.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은 대한민국 기업계의 전설로 통한다. 정 회장은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으로 밑바닥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최고 부자 자리까지 올라온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다.

 

정 회장은 1990년대 정계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낙선한 후 1998년 소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등을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정 회장의 말은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소 판 돈 70원' 훔쳐 가출한 정주영의 도전

1915년 11월25일.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 회장은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 아래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내내 농사를 지었다.

정주영 회장은 1947년 현대토건을 차려 한강대교 복구공사와 미군 관련한 공사를 도맡았다. 사진은 미군과 공사 계약을 체결하는 정주영 회장(오른쪽).
정주영 회장은 1947년 현대토건을 차려 한강대교 복구공사와 미군 관련한 공사를 도맡았다. 사진은 미군과 공사 계약을 체결하는 정주영 회장(오른쪽).

 

농사일이 너무 싫었던 정 회장은 결국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가출했다. 아들을 찾으러 간 아버지는 "서울에는 대학 나온 사람도 많은데 너처럼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냐. 그냥 농사짓자"고 눈물로 설득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그런 아버지를 뿌리치고 결국 서울에 정착했다.

 

정 회장은 건설 현장에서 돌을 나르거나 엿 공장에서 일하고 쌀가게에서 청소하고 배달하며 거의 한순간도 쉬어본 적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정 회장의 나이는 19세였다. 돈을 모은 정 회장은 23세 때 자신의 쌀가게를 차렸다. 하지만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정 회장은 돈을 빌려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다. 잘 되는 것 같았던 공장은 20일 만에 불이나 빌린 돈을 다 날리고 수리 중인 자동차에도 불이 옮겨붙어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좌절하지 않고 처음 돈을 빌려준 사람을 찾아가 "한 번만 돈을 더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다시 한번 돈을 빌린 정 회장은 재기했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정비공장을 세운 정 회장은 1947년 현대토건을 창업했다. 현대토건은 지금의 현대건설로 현대그룹의 모태가 되는 회사다. 현대토건은 당시 한강에서 제일 오래된 인도교인 한강대교 복구공사를 맡아 성공시켰고 미군정 시기에 미군 관련한 공사를 거의 도맡아 했다.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 불굴의 도전정신

정주영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도전했다. 건설현장에 중장비가 필요해지자 중기공장을 세웠고 시멘트가 모자라자 아예 시멘트공장을 세웠다.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사 외에 발전소, 댐, 아파트까지 수많은 건물을 만들었다. 사진은 정주영 회장(오른쪽)과 현대건설 직원들.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사 외에 발전소, 댐, 아파트까지 수많은 건물을 만들었다. 사진은 정주영 회장(오른쪽)과 현대건설 직원들.

 

결국 1968년 현대건설은 국토 대동맥이라 불리는 경부고속도로 첫 구간 공사에 성공했다. 이외에도 발전소, 댐, 대한민국 아파트의 상징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까지 수많은 건물을 만든 현대건설은 2019년 해외사업 매출 기준 국내 1위를 기록했다. 

 

현대건설이 중견기업으로 거듭나며 1971년 정 회장은 조선소를 건립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차관 때문이었다. 정 회장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돈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이것 봐라. 우리가 영국보다 300년 먼저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다"고 설득해 1억달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에 더해 조선소 하나 없이 그리스로부터 26만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결국 2년3개월 뒤인 1974년 울산 조선소가 완공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중공업은 우리나라 경제 상징이자 세계 최고의 조선사가 됐다.

 

1982년 4월 정 회장은 충남 서산 천수만 지역에 간척지 공사를 시작했다. 간척지 공사 성공으로 대한민국 영토는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4700만평이나 늘어났다. 서산 간척지는 염분을 뺀 뒤 농지로 만들었다. 

 

이후 정 회장의 관심사는 온통 서산농장이었다. 정 회장에게 서산농장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자 존경심이었기 때문이다. 말년에 정 회장은 파란 벼로 뒤덮인 농장을 바라보며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들어 가며 고생하셨던 아버지에게 그 농장을 꼭 바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소떼 몰고 방북'… 남북 관계 역사 바꾼 빅 이벤트

어느 날 서산농장에 "이봐, 소도 한 50마리 사서 키워보지?"라는 정 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도로 깔고 아파트 짓던 건설회사 직원들이 수시로 축사를 짓기 시작했다. 소 50마리로 시작했던 농장은 어느덧 몇 년 만에 3500마리나 되는 소로 넘쳐났다.

실향민이었던 정주영 회장은 소를 몰고 북한을 가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소떼 방북을 계획했다. 사진은 소떼 방북 당시의 정주영 회장.
실향민이었던 정주영 회장은 소를 몰고 북한을 가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소떼 방북을 계획했다. 사진은 소떼 방북 당시의 정주영 회장.

 

실향민이었던 정 회장은 소를 몰고 고향인 북으로 가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고 대북 햇볕정책이 시작됐다. 정 회장은 그토록 기다리던 꿈을 이루기 위해 소떼 방북을 계획했다.

 

1998년 6월15일. 당시 83세였던 정 회장은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었다. 휴전 이후 첫 민간인 공식 육로 방문의 길이 열린 것이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정 회장은 "우리 고향 쪽을 가니까 반갑다"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7박8일 동안 정 회장은 금강산을 관광하고 친척과 상봉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후 처음 갈 때와 마찬가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왔다. 이후 정 회장은 금강산 관광 사업권을 유치해 금강산관광의 물꼬를 텄고 개성공단 건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001년 3월21일. 정 회장은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 회장의 빈소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 조문단이 찾아왔다. 소떼 방북은 불과 20여년 전 일이지만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이런 일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와 같은 독특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국내 최대 대기업을 이끌었던 회장은 대표적인 입지전적 기업가로 국내외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임직원들에게 "이봐, 해보기는 했어?"라고 되물었다는 회장의 불굴의 의지는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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