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까지 소프트뱅크 잔여지분 인수해야
거듭된 실적 부진에 증시 입성 늦어져
현대차그룹이 지난 2021년 로봇 제조사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하며 당시 대주주였던 일본 소프트뱅크와 맺었던 풋옵션(매수 청구권)의 행사 시한이 2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를 뉴욕 증시에 상장할 계획이지만, 실적 악화로 올 상반기에는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하기가 어려워져 소프트뱅크의 잔여 지분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1.9%의 개인 지분을 보유한 회사다. 금융 시장에서는 이 회사가 상장된 후 주가가 오르면 정 회장이 지분을 매각해 현대차그룹 순환출자 구조 해소 등 승계를 위한 자금으로 활용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상장이 늦어지면 정 회장의 승계 작업도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6일 완성차 및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6월로 예정된 소프트뱅크의 풋옵션 행사 시점을 앞두고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잔여 지분 인수를 위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지난 1992년 미국에서 설립된 로봇 제조사로 2013년 구글, 2017년 소프트뱅크에 각각 인수된 후 2021년 현대차그룹이 약 1조원에 지분 80%를 사들여 계열사로 편입했다. 당시 현대차가 30%, 현대모비스가 20%, 정의선 회장이 20%, 현대글로비스가 10%씩 각각 지분을 나눠 인수했다.
현대차그룹은 소프트뱅크와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 80%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올해 6월까지 뉴욕 증시에 상장하지 못할 경우 소프트뱅크의 잔여 지분 20%를 인수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포함시켰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이후 실적이 악화되며 기대만큼 빠르게 기업 가치가 오르지 못했다. 매출액은 2022년 782억원에서 2023년 910억원으로 늘었지만, 같은 기간 순손실이 2551억원에서 3348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 3분기까지 순손실 규모는 3156억원이다.
뉴욕 증시 상장도 계속 늦춰졌다. 현대차그룹은 투자 자금 확보 등을 위해 202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유상증자에 나섰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정 회장의 지분 비율은 21.9%로 늘었고, 소프트뱅크의 지분율은 12.4%로 줄었다.
현대글로비스는 지난해 말 기준 사업보고서에서 보스턴다이내믹스 보유 지분 10.95%의 취득 원가를 2647억원이라고 밝혔다. 이 기준으로 환산하면 지난해 말 기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기업 가치는 2조4000억원 수준이다. 현대차그룹이 인수 당시 쓴 돈에 비하면 1조원 이상 평가 차익을 거둔 셈이지만, 정 회장의 승계에 필요한 자금으로는 부족한 수준이다.
정 회장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구조의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이를 해소하려면 현재 보유 지분율이 0.33%에 불과한 현대모비스의 주식을 더 사들여야 한다.
금융 시장에서는 정 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을 충분히 확보하고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려면 6조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정 회장의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 비율이 21.9%인 점을 감안하면 보스턴다이내믹스의 기업가치가 30조원은 돼야 한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소프트뱅크의 잔여 지분을 인수하면 IPO 목표 시한이 사라지는 셈이라 정 회장의 승계 추진 시점도 예상보다 늦어질 것이라는 신호가 될 것”이라며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등 승계의 핵심이 되는 계열사의 주가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가 풋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을 계속 보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금융 시장에서는 소프트뱅크가 현대차그룹에 지분을 전량 매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4년 전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계약 체결 당시 소프트뱅크는 지분을 모두 팔고 싶어 했지만, 자금이 부족하고 위험을 줄이기를 원했던 현대차그룹이 풋옵션을 제시했다. 당시보다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실적이 악화된 상황에서 소프트뱅크가 기약 없는 IPO 때문에 지분을 계속 들고 갈 이유가 없다는 게 금융 시장의 분석이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당시 양측은 풋옵션 계약을 맺으면서 시장 금리보다 높은 IRR(Internal Rate of Return·내부 수익률)을 적용했을 것”이라며 “4년간 잔여 지분의 수익률이 30% 정도로 추정되는데, 소프트뱅크가 굳이 IPO를 기다리면서 이를 포기할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지난해 4월 만든 휴머노이드 로봇(Humanoid Robot·인간의 형태로 만들어진 로봇)인 ‘올 뉴 아틀라스’를 현대차와 기아의 생산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올해 3월에는 이 로봇이 스스로 학습해 일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공개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금융 시장에서는 보스턴다이내믹스가 뉴욕 증시에 입성하고 주가가 오르기 위해선 경쟁사들보다 높은 기술적 우위를 입증해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100여 곳의 상장사가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 중인데, 이 중 절반 이상이 중국 기업이다. 테슬라도 휴머노이드 로봇인 옵티머스의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생성형 AI인 챗GPT의 개발사 오픈AI도 최근 휴머노이드 개발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