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과 용산, 여의도, 성수 등 한강 변 핵심 입지의 대형 사업장들이 시공사 선정 절차를 밟게 된다. 이에 따라 올 하반기 대형 건설사들의 혈투가 예상된다.
몇 년 전만 해도 서울 주요 재건축·재개발 현장에서 시공사 입찰 공고를 내면, 주요 건설사들이 달려들어 각축전을 벌였다. 하지만 공사비 상승,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금 경색,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이 겹치며 최근엔 경쟁이 실종됐다. 건설 업계가 선별 수주에 나서면서다. 사업성이 높은 강남권 정비사업장도 시공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올해 들어 10대 건설사 간 ‘빅매치’가 이뤄졌던 곳은 강북 ‘최대어’로 꼽히는 용산구 한남4구역 정도다.
하반기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질 전망이다. 압구정과 용산, 여의도, 성수 등 한강 변 핵심 입지의 ‘조(兆) 단위’ 대형 사업장들이 시공사 선정 절차를 밟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좋을 뿐 아니라 압구정 등 랜드마크 입지에 깃발을 꽂으면 브랜드 홍보 효과도 거둘 수 있어, 건설사들의 ‘혈투’가 예상된다. 반면 외곽이나 중소형 프로젝트 조합원들 사이에선 ‘시공사 모시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용산 전면1구역 ‘빅매치’
대형 건설사 간 대결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곳이 있다. 용산정비창 전면1구역이다. 포스코이앤씨와 HDC현대산업개발이 맞붙었다. 용산역과 신용산역이 두루 가까운 용산구 한강로3가 40의641 일대 7만1901㎡ 부지에 지하 6층~지상 38층, 12개 동 규모의 공동주택 777가구와 오피스텔 894실, 상업 및 업무 시설 등을 짓는 프로젝트다. 공사비가 9558억 원(3.3㎡당 960만 원)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장이다. 용산국제업무지구, 용산전자상가 개발 등 초대형 개발 프로젝트와 시너지가 기대된다는 평가다.
포스코이앤씨와 HDC현대산업개발은 특화 설계부터 자금 부담 완화까지 다양한 조건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포스코이앤씨는 고급화 전략을 들고 왔다. 전용면적 111㎡ 이상의 대형 평형을 조합안(231가구)보다 49가구 많은 280가구로 늘리겠다고 제시했다. 11가구는 전용 200㎡ 규모의 펜트하우스로 선보인다는 구상이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용산역을 품은 단지’ 청사진을 내놨다. 지하 공간을 통해 단지와 용산역을 연결하겠다는 얘기다. 지하로 다니는 유동인구를 흡수하면 상권 경쟁력도 더 키울 수 있다는 복안이다.
금융 비용, 인건비, 원자재 가격 등 공사 원가가 모두 다 같이 뛰고 있다. 이 때문에 공사비 상승으로 인한 분담금 증가를 우려하는 조합원들이 적지 않다. 두 회사가 조합원의 자금 부담을 덜 방안을 속속 내놓고 있는 배경이다. 포스코이앤씨는 조합원 추가 이주비에 대해 담보인정비율(LTV) 160%를 적용하기로 했다. 시공사는 보통 공사 진행 상황에 따라 공사비를 우선적으로 받는다. 하지만 포스코이앤씨는 조합이 분양을 통해 확보한 수입 범위 내에서 공사비를 지급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HDC현대산업개발은 사업비 조달 금리를 ‘양도성예금증서(CD)금리+0.1%’로 제시했다. 역대 도시정비사업 중 최저 수준으로 꼽힌다. 조합의 원안 대비 분양면적을 1만8681㎡ 더 확보하겠다는 카드도 눈에 띈다. 이를 통해 3755억 원(가구당 8억5000만 원) 이상의 추가 분양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포스코이앤씨는 용산에 깃발을 꽂아 하이엔드 브랜드인 ‘오티에르’의 인지도를 높이려 하고, HDC현대산업개발은 아이파크몰 등과 더불어 용산에 ‘HDC 타운’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승자는 누가 될까. 6월 중순으로 예정된 조합 총회에서 결정이 날 전망이다.
‘대표 부촌’ 압구정도 뜬다
가장 ‘박 터지는’ 전쟁은 서울의 대표적 부촌인 강남구 압구정에서 일어날 전망이다. 압구정은 현재 6개 구역으로 나뉘어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속도가 가장 빠른 압구정2구역이 6월 시공사 입찰 공고를 낼 예정이다. 세 차례의 합동설명회를 거쳐 오는 9월 시공사를 최종 선정한다는 일정이다. 국내 1, 2위 건설사인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이 압구정2구역을 두고 물밑 경쟁부터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2구역은 압구정역과 현대백화점 등이 가까워 압구정 중에서도 특히 입지 경쟁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물산은 지난 5월 압구정역 인근에 주거 브랜드 홍보관인 ‘압구정 S라운지’를 개관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부르즈 할리파’(828m)와 말레이시아 ‘메르데카 118빌딩’(679m) 등 세계 초고층 빌딩을 지은 삼성물산의 기술력 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현대건설은 지난 3월 ‘압구정 현대’의 상표권을 출원했다. 압구정 수주를 위한 전담 팀도 뒀다. 두 건설사는 지난 1월 한남4구역을 두고 이미 한차례 맞붙었다. 당시엔 삼성물산이 승리를 맛봤다.
이번엔 한층 더 치열한 ‘리턴매치’가 펼쳐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현대건설 입장에선 한남4구역에서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다. 삼성물산도 앞서 응찰을 검토하던 송파구 잠실우성1·2·3차나 강남구 개포주공6·7단지에 최종 참여하지 않으면서, 압구정2구역에 ‘올인’하기 위한 체력을 비축해 뒀다. 압구정2구역은 1982년 준공된 신현대9·11·12차로 구성돼 있다. 총 27개 동, 1924가구 규모다. 재건축을 통해 최고 65층, 2571가구로 탈바꿈한다. 공사비가 2조4000억 원에 이르는 ‘매머드급’ 사업장이다.압구정 재건축의 첫 타자인 2구역을 품에 안을 경우, 압구정의 다른 사업장을 수주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후속 단지로는 압구정3·4·5구역 등이 꼽힌다. 최고 70층, 5175가구로 재건축을 추진 중인 3구역(현대1~7·10·13·14)은 압구정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3구역은 뿌리가 현대인 만큼, 현대건설이 우위를 보일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2·3구역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작은 4구역(재건축 후 1722가구)과 5구역(1401가구)은 다른 대형 건설사들도 눈독을 들일 것으로 분석된다.
여의도·성수도 재건축 ‘속도’
1970년대에 지어진 여의도의 16개 단지들도 일제히 재건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여의도는 워낙 탄탄한 직주근접 지역인 데다,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각종 개발 호재도 안고 있어 부동산 시장의 관심이 큰 곳이다. 최근 신고가 거래가 잇따르고 있는 여의도에서도 올해 하반기 수주전이 예고돼 있다. 여의도대교가 주인공이다. 1975년에 12층, 576가구 규모로 지어진 단지다. 최고 49층, 912가구로 재건축을 추진 중이다. 6월 시공사 입찰 공고를 낼 것으로 보인다. 공사비는 약 9000억 원 수준이다.여의도에선 이미 대형사 간 정면승부가 펼쳐진 바 있다. 2023년 말 여의도공작(49층·582가구)은 대우건설이 단독 입찰해 시공사 지위를 따냈다. 하지만 지난해 초 여의도한양(56층·992가구로 재건축)을 두고선 현대건설과 포스코이앤씨가 세게 맞붙었다. 결과는 현대건설의 승리였다. 이번 대교의 시공권을 두고도 경쟁 구도가 성립할 전망이다. 업계에선 삼성물산과 롯데건설 등의 참전을 예상하고 있다. 여의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시범(65층·2473가구)도 이르면 연내 시공사 선정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신흥 부촌’이라 불리는 성동구 성수전략지구 재개발도 속도가 붙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4월 성수1~4지구의 정비계획 결정 및 정비구역 지정안을 고시했다. 한강 변에 최고 250m 높이의 랜드마크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 여의도 63빌딩(249m)과 맞먹는 수준이다. 성수동 상권과 서울숲이 가까운 데다 정보기술(IT)·유통 기업들도 성수에 몰려들고 있어 건설사 대부분이 ‘성수 입성’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1~4지구 중 규모가 가장 큰 성수1지구가 6~7월께 시공사 입찰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성수1지구는 총 3014가구 규모로, 예상 공사비는 약 2조 원이다. 현대건설과 GS건설 등이 관심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성수2지구(2609가구)도 연내 어떤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를 달지가 결정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압여목성(압구정·여의도·목동·성수)’의 한 축인 양천구 목동신시가지 재건축 프로젝트에서도 연내 시공사 선정 사례가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목동에서 처음으로 조합 설립 단계를 밟은 목동6단지 관계자는 “이르면 연말 시공사 입찰 공고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퍼즐’이라 불리던 목동1~3단지의 정비계획이 최근 공개되는 등 14개 단지 모두 재건축 밑그림을 구체화했다.
외곽은 ‘시공사 모시기’ 난항
경쟁 구도가 성립되면 조합원 입장에선 당연히 이점이 많다. 건설사들이 조합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금융 혜택이나 고급·특화 설계 등 파격 조건을 경쟁적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어서다. 압구정이나 여의도 등 핵심 권역의 분양을 기다리는 청약 수요자 입장에서도 시공사 선정 절차 등이 매끄럽고 신속하게 진행되는 게 나쁘지 않다. 시공사를 구하지 못해 유찰이 거듭되면 정비사업 전체 일정이 밀릴 수밖에 없어서다. 다만 시공사를 선정한 이후에도 건설사와 조합 간 공사비 갈등 등의 문제로 사업이 공회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형사들의 시선이 압구정, 여의도, 성수 등으로 쏠려 있는 걸 지켜보는 다른 지역 정비사업장들의 속내는 편치 않다. 서울 대부분의 사업장들이 시공사를 제때 구하지 못해 우려하고 있는데, 이런 근심이 더 깊어질 수 있어서다. 강남 핵심 사업장도 ‘무혈입성’ 사례가 늘고 있다. 공사비가 1조6934억 원에 달하는 잠실우성1·2·3차는 GS건설만 단독 입찰해 수의계약으로 전환할 태세다. 역시 ‘조 단위’ 사업장인 강남구 개포주공6·7단지도 현대건설만 단독 참여하며 경쟁 구도가 무산됐다.
서울 외곽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는 지난 4월 시공사 선정 입찰을 마감했는데, 단 한 곳도 참여하지 않았다. 공사비를 2023년 1월(3.3㎡당 650만 원)에 비해 120만 원 올려 3.3㎡당 770만 원으로 내걸었는데도,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경기도 의정부 호원2구역의 경우 두 차례에 걸친 시공사 선정 입찰 모두 무응찰로 마감했다. 압구정 등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사업장들이 ‘시공사 모시기’에 어려움을 겪으면, 전반적인 주택 공급 속도가 더뎌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정비 업계 관계자는 “건설사 입장에선 입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고, 만약 패배하면 이미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사업성이나 상징성이 뛰어난 사업장 중심으로 선별 수주 기조가 강해지고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