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투자냐 철수냐 ‘투자 재점검’
LG그룹이 주요 계열사를 대상으로 투자 프로젝트 재점검에 나서면서 그룹 안팎에서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매년 실시되던 전략보고회가 생략되고 그룹 차원 투자 점검이 이뤄지는 것을 재계는 심상찮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일각에선 사업부별 내재 가치 진단을 거쳐 지속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따져보는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미 계열사 사업부별 선택과 집중은 진행 중이다. LG화학은 세계 2위 담수처리 사업인 워터솔루션 부문 매각을 추진 중이고 LG전자는 전기차 충전 사업에서 손을 뗐다. 수요 불확실성과 실적 둔화가 뚜렷한 사업부를 중심으로 추가 투자와 철수 사이 갈림길에 놓일 전망이다.
재계에 따르면 최근 LG그룹은 전자, 화학, 통신 등 주요 계열사를 대상으로 투자 점검에 나섰다. 지주사 ㈜LG 주도로 진행 중인 이번 진단은 권봉석 부회장(최고운영책임자·COO)이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주사 차원에서 전 계열사를 대상으로 투자 계획을 직접 점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계열사별 투자 프로젝트 점검 결과는 구광모 회장 보고를 거쳐 실행 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회의는 그룹 성장 사업·비전과 핵심 역량 간 정렬 차원 성격이 짙다는 게 그룹 안팎 평가다. 제한된 자원으로 신성장동력을 향해 밀도 깊은 투자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당초 의도했던 핵심 역량 개발·전환이 이뤄지기 힘들 것이란 그룹 수뇌부 판단이 깔려 있단 의미다. 지난 3월 사장단 회의에서 구광모 회장이 “모든 사업을 다 잘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더더욱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실행 전략의 일환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이번 투자 점검은 본업 현금흐름이 둔화하는 추세 속 성장 동력 투자 마중물 마련 목적도 있다고 재계와 시장은 바라본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ABC’를 미래 먹거리로 삼았다. ABC는 AI(인공지능), Bio(바이오), Clean tech(클린테크) 앞 글자를 딴 것. 2024년부터 2028년까지 5년간 이 분야에 100조원 규모 투자에 나선 데다. 주력 사업 수익성이 악화하면 내부 유보금이 줄고 외부 조달비용이 늘어나 미래 투자 여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특히, LG그룹이 성장 동력으로 낙점한 배터리, 바이오, OLED 등은 설비투자(CAPEX)·연구개발(R&D) 등 선투자-후성과 구조로 시차가 비교적 긴 편이다. 가령 LG전자, LG에너지솔루션, LG디스플레이, LG화학 등은 대규모 생산설비 구축 → 상용화 → 매출화까지 보통 수년 단위 시간이 소요된다. 이들 업종에선 수년간 R&D·초기 고정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를 후방 지원할 수 있는 내부 자원이 결핍될 경우 외부 조달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레버리지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지만, 산업계와 시장에선 LG그룹 핵심 계열사 본업 경쟁력을 바라보는 우려 섞인 시선이 적지 않다.
주력 계열사 LG전자의 연결 기준 올 1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6% 줄었다. 실적 둔화와 관련, LG전자 측이 ‘일회성 비용 탓’이란 설명을 잇따라 내놓자 시장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이 확산됐다. 본업 경쟁력 훼손을 일회성 요인으로 단순하게 치부하고 위기 상황을 안일하게 인식하는 것 아니냐는 진단이다. LG전자는 지난해 하반기에 이어 올 1분기 실적 발표 때도 “일회성 비용이 늘어 실적이 다소 부진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LG전자는 2023년 7월(2023년 2분기), 2024년 1월(2023년 4분기) 실적 발표 때도 부진의 원인을 ‘일회성 비용’에 돌렸다.
전자, 中 파상공세 부담
LGD, 광저우 매각 대금 기대
통상 일회성 비용은 ▲비경상적(non-recurring) ▲비반복적(non-repetitive) ▲일시적(transitory) ▲예외적(unusual) 속성을 갖춰야 된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LG전자 측이 일회성 비용이라 밝힌 물류비와 마케팅 비용 등은 어떤 잣대로 봐도 ‘일회성’으로 치부하기 힘들다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익명을 원한 가전 업종 애널리스트는 “그렇지 않아도 LG전자는 삼성전자 대비 일회성 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은 회사라는 인식이 짙은데,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 1분기 때도 일회성 비용 탓이란 핑계를 대자 이쯤 되면 진짜 실력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오갔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LG전자가 속한 가전 업종의 경우 중국 파상공세가 실질적 위협 요인으로 대두됐다. TV 시장점유율 변화는 LG전자의 흔들리는 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장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LG전자는 지난 1분기 매출 점유율 15%로 세계 2위를 수성했다. 다만 중국 업체 TCL(13.3%), 하이센스(10.9%), 스카이워스(3.7%) 등과 격차가 매년 줄고 있다. 출하량 점유율에서 LG전자는 중국 공세에 밀려 10.7%로 4위에 그쳤다.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좋은 OLED TV 시장에서는 1위를 사수했다. 중저가 TV의 경우 ODM(제조자개발생산) 비중을 늘려 비용 효율성을 개선하고 OLED 부문으로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광저우 LCD 공장 매각으로 한숨 돌린 LG디스플레이도 긴장감이 높다. LG디스플레이는 올 1분기 영업이익 335억원으로 흑자전환했지만, 여전히 약 24조원을 웃도는 부채를 안고 있다. 부채비율은 308%로, 1분기 이자로만 약 2010억원을 냈다. LG디스플레이는 지주사 LG 손자회사지만 전자와 화학에 이은 자산 규모 3위 회사라는 점에서 실적 부진은 그룹 차원에서도 뼈아픈 대목이다.
LG디스플레이는 LCD 철수가 상대적으로 늦은 데다 대형 OLED 부진이 뼈아팠는데, 추세 반전을 이루기 녹록지 않은 대외 여건이 지속되고 있다. OLED 시장조차 대중국 경쟁 강도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중국 디스플레이 설비투자 가운데 OLED 비중이 2027년 83%로 한국(13%)의 6배를 넘고(카운터포인트리서치) 2028년 중국 OLED 생산능력이 한국을 넘어설 것(DSCC)이란 경고도 나왔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 BOE가 고난도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패널인 ‘저온다결정산화물(LTPO)’ OLED 시장에 진입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으로 산업계는 보고 있다.
본업 현금흐름이 위축되다 보니 수요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큰 선행 투자를 주저하는 전략적 경직성도 엿보인다. 광저우 LCD 공장 매각 대금인 2조2466억원이 올 2분기부터 순차적으로 들어오지만, 재무 구조 개선과 선행 기술 투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기엔 아쉽다는 평가다. 강민구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LG디스플레이는 현재까지 수요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8세대 증설에 대해 보수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재무 구조가 악화된 점이 증설 지연 원인으로 판단된다”고 진단했다. LG디스플레이는 유기발광층을 2개 층으로 쌓아 화면 밝기·수명을 개선한 탠덤 기술 기반 P-OLED를 중심으로 ATO, 하이엔드 LTPS LCD 등 차별화 제품 개발에 집중한다.
또 다른 주력 계열사 LG이노텍도 안심할 상황이 못 된다. LG이노텍 역시 본업 현금흐름이 위축된 가운데 전장 사업을 중심으로 다각화를 이뤄야 하는 험준한 도전에 직면했다. 올 1분기 LG이노텍 매출액은 지난해 1분기보다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28% 줄었다. 애플 의존도가 높은 LG이노텍은 전장 사업을 매출 기여도 측면에서 유의미하게 성장시키는 게 숙원 과제다. 다만, 고부가가치 제품이 많이 들어가는 전기차 시장 회복이 단기간 요원한 점이 아쉽다.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도 투자 효율성을 높이는 게 갈급한 과제다. LG화학이 속한 석유화학은 비관론이 가장 짙은 업종으로 설비투자 동력을 마련하는 게 난제로 지목된다. LG에너지솔루션도 사활을 건 ‘선택과 집중’에 나선다. 이 회사는 올 1분기 미국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금액을 제외하면 830억원 적자다. 김철중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올 2분기 LG에너지솔루션 매출은 전 분기보다 10% 줄어든 5조7000억원, 영업이익은 3790억원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정책 불확실성 속에서 전방 고객사의 보수적인 재고 전략이 실적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