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위기, 인력난, 생산성 압박 등 기계·제조업을 둘러싼 복합 위기를 타개할 돌파구로 인공지능(AI)과 디지털전환이 급부상하고 있다. 과거 하드웨어 중심의 경쟁력은 더 이상 차별화 요소가 아니다.
베인이 실시한 최신 설문 조사에 따르면 첨단 기계·제조업 임원 중 75%가 AI를 포함한 신기술 도입을 연구개발(R&D)의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산업용 기계 관련 AI 시장은 2028년까지 연평균 45% 이상 성장해 약 54억6000만 달러(약 7조5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제조업은 현재 디지털전환의 ‘진실의 순간’을 맞고 있다. 데이터 축적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AI를 활용해 데이터를 수익화하고 있는 기업은 극히 드물다. 데이터는 쌓았지만 가치는 만들지 못하는 전형적인 함정에 빠진 것이다.고객은 제품보다 ‘문제 해결력’을 원하고 있고 이를 위한 수단이 바로 AI다. 존디어, 보쉬렉스로스, 슈나이더일렉트릭, 힐티 등 글로벌 기계·제조업 선도 기업들은 단순히 AI를 도입한 것을 넘어서 고객의 고질적 문제를 정의하고 그에 맞는 AI 솔루션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업(業)을 바꿔 나가고 있다.
존디어: 농업 솔루션 기업으로 변혁
미국의 농기계 제조사 존디어는 지난 10년간 AI와 디지털 기술에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기계 제조 회사가 아닌 ‘농업 솔루션 기업’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다. 이 회사는 2022년 세계 최초로 자율주행 트랙터를 상용화했다. GPS, 센서, 카메라, AI 알고리즘을 통합해 운전자가 없어도 자동으로 경작이 가능하다.또한 AI 기반의 ‘See & Spray’ 기술은 카메라로 작물과 잡초를 구별해 농약을 정밀하게 살포한다. 이 기술은 농약 사용량을 77%까지 절감하며, 환경 보호와 비용 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현재 존디어는 전 세계에 150만 대 이상 기계를 연결한 클라우드 운영센터를 운영 중이며 이곳에서 수집된 농업 데이터를 분석해 작물 생산성을 높이는 소프트웨어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힐티: 드릴 제조 회사에서 건설 디지털 강자로
스위스 기반 건설기기 업체 힐티는 강렬한 붉은색 전동공구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스위스 전통 제조 기업은 최근 건설 현장의 디지털화에 앞장서는 기술 파트너로 변모 중이다.
힐티는 2020년대 초반 3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 소프트웨어 기업을 인수했고 사내 R&D에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 중이다. 힐티는 중소 건설업체를 대상으로 장비 위치 추적, 작업 일정 관리, 인력 배치 자동화 등의 사물인터넷(IoT)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더 나아가 전문 컨설턴트가 고객사 현장을 직접 분석하고 맞춤형 디지털전환 전략을 설계해주는 기술 도입 성공 지원 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힐티는 기존의 직접판매 모델에 소프트웨어 전문 인력을 결합해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융합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창고·물류도 AI 혁신…재고 줄이고 납기율 높여 고객 만족도↑
AI 전환은 단순하지 않다. 기업들이 직면하는 첫 번째 허들은 ‘데이터 혼란(unstructured data)’이다. 전 세계 기계 업체의 90% 이상이 생산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지만 이를 분석해 활용하는 곳은 30%에 불과하다. 레거시 시스템, 부정확한 데이터, 표준화 부족 등이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슈나이더일렉트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기업 아베바를 인수했다. 아베바가 지닌 엔지니어링·운영 툴을 활용해 ‘EcoStruxure’라 불리는 새 플랫폼을 출범했다. 생산 설비부터 물류 창고, 공급업체 네트워크까지 모든 데이터를 연결하기 위해서다.이 플랫폼은 실시간 모니터링과 자동화 의사결정을 지원하는데 이를 통해 공급망 병목 현상을 사전에 탐지한다. 또한 AI가 제시하는 대체 경로로 자동 우회하는 기능까지 확보했다. 이처럼 AI는 창고 및 공급망 영역에서도 전환점을 만들고 있다.
또 다른 한 글로벌 기계 업체는 AI 기반 재고관리 솔루션을 적용해 초과 재고를 최소화하면서도 주문 이행률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의 시스템은 수요예측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재고 수준을 조정하며 적재·적하 작업을 최적화해 물류비용을 약 20% 줄였다.
AI의 실질 효과…생산성 5% 향상, 불량률 70% 감소
AI는 단순한 자동화 도구가 아니다. 공정 데이터, 영상 정보, 센서 신호 등 비정형 데이터를 분석해 작업자의 눈과 손을 대신하는 디지털 조력자로 진화 중이다.
예컨대 독일의 한 소재 업체는 화학 벌크 원자재 내 이물질을 식별하는 데 AI 기반 컴퓨터 비전을 활용해 기존 수작업 대비 80% 높은 정확도를 달성하며 자동화 검사 정밀도를 99% 이상으로 끌어올렸다.또한 AI 영상인식 기반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수작업 조립 공정의 실시간 오류 탐지를 구현한 회사도 있다. 이 글로벌 기계 제조사는 그 결과 조립 불량률을 70% 줄이고 품질검사 인력 투입은 50% 줄인 것으로 분석된다.
자연어 명령을 코드로 자동 변환하는 AI 코파일럿을 도입한 사례도 있다. 기존 프로그래밍 작업 대비 속도는 빠르면서도 오류는 줄어 엔지니어 생산성이 약 5% 상승했다. 데이터 배포 과정의 장애도 감소해 장비 가동 중단 시간도 대폭 단축했다.
‘기계공학’ 중심의 전통 제조업 조직문화 AI와 충돌AI 도입이 어려운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조직문화의 간극이다. 기계공학 기반 조직은 수십 년간 정답 중심의 사고방식과 완성도 중심의 제품 설계를 핵심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 AI는 본질적으로 반복적인 실험과 오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능을 높여가는 기술이다. 정형화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빠르게 시도하고 빠르게 실패하며 개선하는 ‘애자일’ 방식이 필수적이다.
AI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기업들은 이 같은 인식 차를 극복하기 위해 엔지니어와 데이터 과학자가 함께 협업하는 ‘교차 기능형 팀’을 구성하고 있다.
생산 현장의 기술적 맥락과 데이터를 이해하는 제조 엔지니어와 알고리즘을 개발·운영하는 AI 전문가가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테스트하며 반복 학습을 통해 알고리즘을 최적화한다. 이 과정에서 실패는 학습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며 점진적인 개선이 조직 전체의 역량 향상으로 연결된다.
숨겨진 비용까지 고려한 정밀한 수익성 검토 필요
AI 프로젝트의 또 다른 장애물은 명확한 투자 수익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많은 기업들이 AI 도입 초기에는 모델 개발과 시스템 통합에 집중한 나머지, 클라우드 연산 비용, 운영·유지보수, 내부 교육과 역량 강화 비용과 같은 숨은 비용을 간과한다. 이러한 비용 누락은 프로젝트 전체 수익성 평가를 왜곡하고 장기적인 기술 투자를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선도 기업들은 AI 프로젝트마다 분기별 ROI 점검 체계를 마련하고 마이크로서비스 기반의 유연한 시스템 아키텍처를 도입해 기술의 확장성과 유지보수성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시스템을 소규모 컴포넌트 단위로 분리하고 필요시 신속 교체할 수 있도록 해 AI 기술 변화 속도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처럼 기술뿐만 아니라 조직문화와 투자체계까지 포함한 전사적 AI 전략 없이는 디지털전환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AI는 기술이자 경영 방식의 대전환이며 이를 위한 문화적·재무적 준비가 병행되어야 한다.
디지털전환에 선제적으로 투자한 제조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 대비 총주주수익률(TSR)에서 100% 이상의 격차를 보인 것으로 분석된다. AI가 만들어내는 산업의 지각변동은 이제 시작이다. 미래의 기계산업은 ‘기술을 가장 잘 쓰는 기업’이 시장을 주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더 이상 단순한 장비가 아닌 ‘스마트한 문제 해결 능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