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저 ‘가격이 고정된 코인’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2014년 ‘테더(USDT)’라는 디지털 토큰이 등장했을 때도 시장의 반응은 조용했다. 비트코인의 변동성을 피해 거래를 좀 더 편하게 하려는 기술적 시도로만 여겨졌다. 그 당시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생태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존재였다.
그로부터 10년, 판이 바뀌었다. 아마존, 월마트, 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검토 중이고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남미, 아프리카 등 일부 개발도상국에선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이 현지 화폐를 대체하고 있다. 세계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서두르며 통화질서 재편에 대비하고 있다.
세계경제 지형을 뒤흔드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궁금증을 정리했다.
Q. 왜 지금 ‘스테이블코인’인가요?
지난 1년간 가상자산 시장은 크게 요동쳤다. 대장주인 비트코인의 개당 가격은 7월 14일 12만 달러를 찍었다. 비트코인 시가총액(2.3조 달러)은 메타(1.7조 달러)나 테슬라(1조 달러)를 추월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도 성장했다. 5월 말 시총이 2300억 달러(주요 10개 스테이블코인 기준)를 돌파했다. 1년 새 50% 넘게 늘었다. 24시간 시장이 돌아가는 만큼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가장 힘센 나라 ‘미국’이 있다.
통화질서의 변화는 언제나 권력 이동과 함께해 왔다. 19세기 세계는 영국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달러가 새로운 기축통화 자리를 차지하며 금융과 무역의 중심축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금본위제, 페트로 달러 시스템, 스위프트(SWIFT·미국 주도 국제결제시스템)를 활용해 달러 기축통화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런데 달러패권이 흔들리고 있다. 기축통화 역할을 하려면 세계 곳곳으로 달러가 흘러가야 한다. 이 구조상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가 불가피하다. 미 재무부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계속해서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데 최근 중국과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등 주요 수요처가 매입을 확 줄였다. 수요가 줄면 국채금리가 상승(국채 가격 하락)하고 미국의 비용(이자)은 커진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이미 연간 약 2조 달러에 달한다.
이때 트럼프 행정부가 구원투수로 꺼내든 카드가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으로 인해 미 국채에 대한 수요가 수조 달러 늘어날 것으로 봤다.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는 스테이블코인의 90%가 달러화에 연동돼 있다. 대부분 미 국채를 담보로 하고 있다. USDT, 유에스디코인(USDC) 등이 대표적이다. 테더사의 미 국채 보유량은 약 1000억 달러로 독일(880억 달러), 멕시코(958억 달러)보다 많은 큰손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세계 곳곳에서 유통될수록 미 국채 수요가 늘고 이는 곧 달러 지배력 강화로 이어진다는 전략이다.
미 상원은 지난 6월 17일 관련 법안인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통과시켰다. 하원 표결만 남았다. 이 법안은 은행뿐 아니라 신용조합, 비은행 기관 등 ‘민간’ 기업도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으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게 한 것이 골자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을 통해 달러의 디지털 버전을 더욱 많은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Q. 도대체 스테이블코인이 뭐죠?
쉽게 말하면 ‘가격이 고정된 디지털 화폐’다. 달러 또는 다른 실물자산에 일대일로 연동한다. 그래서 이름도 ‘Stable(안정적인) + Coin(화폐)’이다. 반면 비트코인은 가격이 급등락하는 대표적인 ‘변동성 자산’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대부분 토큰(Token) 형태로 발행한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자체 블록체인을 가진 코인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블록체인 위에 발행·유통하는 디지털자산이다. 일종의 상품권이나 포인트와 유사한 구조다.
이는 기술적·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①코인은 운영과 보안, 설계 등 전방위적 인프라 필요로 돈이 많이 든다. ②이더리움같이 이미 검증된 기존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면 ‘토큰 발행’만으로도 생태계에 바로 진입할 수 있다. ③스테이블코인의 핵심은 블록체인의 독립성이 아니라 일대일로 연동된 자산의 신뢰에 있다. 굳이 자체 블록체인을 새로 만들기보다는 ‘이게 정말 1달러짜리인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테더는 같은 테더라도 체인마다 주소체계, 수수료 구조, 거래 방식이 다르다. 거래소·지갑마다 지원하는 체인도 제각각이다. 이더리움, 트론, 솔라나 등 여러 블록체인 위에 동시에 발행하는 ‘멀티체인 전략’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트론 기반 테더는 전송 속도가 빠르고 수수료가 낮아 국제 송금 시장에서 많이 쓰인다. 이더리움 기반 테더는 다양한 탈중앙화 금융(DeFi) 서비스에 활용한다. 멀티체인 전략으로 사용처가 많아지고 거래량이 커지면 그만큼 신뢰가 높아지고 발행사가 보유한 국채나 현금 자산도 늘어나게 된다.
스테이블코인의 기본 역할은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에서의 지급수단이다. 비트코인·이더리움 등을 사는 데 스테이블코인이 활용된 것이다. 최근 전체 가상자산 거래량의 84%가 스테이블코인으로 구성돼 있으며 월별 송금 규모는 1조 달러를 넘었다(온체인 데이터 분석 플랫폼 토큰터미널).
Q. 루나·테라 코인도 스테이블코인 아닌가요?
원래 스테이블코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다. 달러 같은 실물자산을 담보로 하는 ‘담보형’과 별도의 담보 없이 알고리즘으로 공급과 수요를 조절해 가격 안정성을 유지하는 ‘알고리즘형’이다.
알고리즘형 스테이블코인의 대표 사례였던 루나·테라 코인은 지난 2022년 5월 대폭락 사태를 겪으며 전 세계에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 사건 이후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는 담보형이 사실상 대세로 자리 잡았다.
Q. 소비자에게 어떤 혜택이 있나요?
해외로 돈을 보낼 때 수수료는 낮추고 속도는 높이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지금까지는 원화를 달러로, 달러를 다시 현지 통화로 바꾸는 복잡한 절차에 높은 수수료가 붙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중간 환전 없이 원화와 현지 통화를 ‘직접 맞교환’할 수 있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블록체인에서 바로 전송되기 때문이다. 수수료는 기존의 절반 이하로 줄고 송금 시간은 수시간에서 수분, 많게는 수초까지 단축된다.
스테이블코인은 일반적으로 사용자에게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다. 예금자를 보호하거나 대출을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빠르고 싸고 은행 없이도 달러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신흥국 투자자, 해외 거래소 이용자, 블록체인 결제 사용자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 환경에서 즉시 유통 가능한 달러’로 받아들이고 있다.
Q. 발행사는 어떻게 돈을 버나요?
스테이블코인은 들어온 돈만큼만 토큰을 찍어내는 구조다.
발행사는 주로 ‘예치금 운용’을 통해 수익을 올린다. 사용자가 1달러짜리 스테이블코인을 사면 발행사는 그만큼의 실제 달러를 국채나 예금 형태로 보관하고 운용한다. 이때 생기는 이자 수익이 주요 수입원이다.
예를 들어 발행량이 1000억 달러라면 이 돈은 단기 미국 국채 등에 투자돼 연 4~5%의 수익을 낸다. 미국 기준금리가 높을수록 발행사의 수익도 함께 늘어난다. 테더의 발행량은 약 1400억 달러 규모다. 그중 1200억 달러 이상을 미 국채에 투자하고 있다. 2024년 1분기 45억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15억 달러)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일부 발행사는 환전 수수료나 특정 국가 수요에 붙는 프리미엄, 자사 플랫폼 내 결제 유도 등을 통해 추가 수익도 얻는다.
Q. 기업들은 왜 관심을 갖는 건가요?
낮은 수수료, 24시간 실시간 정산, 국경 간 송금까지 가능한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카드 결제망의 한계를 보완하며 ‘차세대 결제 인프라’로 주목받고 있다. 수수료와 정산 시스템 등에서 수익을 올려온 전통 금융사 입장에선 ‘밥그릇’을 위협하는 변화이기도 하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코인 육성에 나서자 글로벌 기업들의 대응도 빨라졌다.
전 세계 결제 네트워크를 장악한 비자(V)와 마스터카드(MA)는 기존 결제망에 스테이블코인을 연동하며 시장 진입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 대형은행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가상자산 회의론자로 알려진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회장은 최근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우리는 JP모간 예치금 코인(JPMD)과 스테이블코인 모두에 관여할 것”이라고 밝혔고,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최고경영자(CEO)도 “‘씨티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검토 중”이라며 “가장 중요하게 보는 분야는 토큰화된 예금”이라고 언급했다.
미 재무부 차입자문위원회(TBAC)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가 지난 5월 2429억 달러에서 2028년 약 2조 달러 규모(2025년 대비 8.3배)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IT 유통 기업들도 스테이블코인을 주목하고 있다.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국 월마트는 매년 약 100억 달러에 달하는 신용카드 결제 수수료를 부담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도입으로 결제 수수료가 크게 낮아지면 월마트의 수익성을 최대 6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온라인 유통망을 운영하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스테이블코인 시장 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기업은 이미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관련 다수의 상표권을 출원하고 있다. 상표 출원이 곧바로 사업화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일단 사전 조치부터 취하고 보는 것이다.
국내 상표권 경쟁은 금융권과 핀테크 업계를 가리지 않고 본격화하고 있다. 특허청 키프리스에 따르면 올해에만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 출원이 300건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Q.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왜 필요한가요?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통화주권 경쟁의 새로운 전장이 되고 있다. 미국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앞세워 디지털 패권을 강화하고 있고 이에 맞서 각국은 자국 화폐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통화의 디지털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일본은 일찍부터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율 체계를 마련해 금융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홍콩도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실험을 허용했고 유럽연합(EU)은 가상자산시장법(MiCA)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하고 있다.
한국 역시 대선 이후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후 ‘1코인=1000원’ 식으로 코인의 가치를 법정 통화와 연동시키는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여당도 관련 입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자기자본 5억원·비은행 민간업체도 포함)과 금융위원회 인가 체계 등을 담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발의했고, 안도걸 민주당 의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액의 100% 이상 담보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K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에도 유리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할 수 있는 인프라를 선점하면 외국 소비자가 복잡한 환전 과정 없이 손쉽게 결제할 수 있다. 콘텐츠 기업은 결제 인프라를 직접 확보함으로써 수익 회수 속도를 높이고 외환 리스크도 줄일 수 있다. 일각에선 “K컬처 기반의 팬덤 경제가 원화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를 먼저 활성화시킬 수도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Q. 우려점은 없나요?
하지만 비기축통화인 원화를 활용한 스테이블코인이 과연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국제 결제 수단으로 자리잡기 위해선 발행 화폐의 신뢰도, 환금성, 투명한 준비금 관리가 핵심인데 국제 결제시장에서 원화의 지위는 낮다. 이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확장성의 한계점으로 지적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유럽중앙은행(ECB) 포럼에 참석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존재 자체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의 전환을 더 쉽게 만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가 발행할 것인가’도 문제다. 정부가 직접 발행하기엔 사실상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중복될 우려가 있고 민간이 발행하면 통화질서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비은행 민간 사업자의 참여를 허용할 경우 자산담보 체계나 소비자 보호 장치가 미비하면 제2의 테라·루나 사태가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미국에서도 스테이블코인의 민간 발행을 둘러싼 감독 공백과 금융불안 가능성을 놓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은 스테이블코인 확산에 경고음을 내고 있다. 가격 불안정성과 코인런(대규모 인출 사태), 신흥국에서의 자본 유출 위험 등을 우려했다. 예컨대 2023년 1월부터 11월까지 주요 스테이블 코인의 ‘디페깅(가치 유지 실패)’이 600번 이상 나타났다(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 준비자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코인런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를 막을 안전장치가 없다.
금융범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할 문제다. 국경을 넘더라도 자금 흐름 추적이 어려운 코인 특성상 외환규제나 과세회피, 자금세탁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