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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국 사모펀드(PEF) 시장은 양면적인 모습을 동시에 드러냈다. 지표상으로 살펴보면 회복세가 뚜렷했다. 2023년 하반기부터 살아난 시장 분위기는 지난해 본격적인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

 

베인에 따르면 국내 PE 인수합병(M&A) 시장 규모는 약 204억 달러를 기록해 전년 대비 20% 가까이 증가했다. PE 엑시트(exit) 시장 규모도 125억 달러를 기록, 전년 대비 70% 넘게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 M&A 상위 20대 거래 중 19건에 PEF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전체 거래에서 PEF의 자산 매각이 차지하는 비중도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단순 투자자를 넘어 시장 내 ‘주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모습도 확인된 한 해였다.그러나 시장 내부를 들여다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투자 자산의 회수 기간은 계속 길어지고 있다. 펀드 조달도 과거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평균 3.7년이었던 포트폴리오 보유기간이 지난해 5.2년까지 늘어난 점은 사모펀드가 받는 압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큰 수익을 안겨다 준 기존의 플레이북(전략)은 점차 효력을 잃고 있으며 운용사 간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는 추세다.

 

여기에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도입과 자본 유입 구조의 근본적 변화까지 겹치면서 사모펀드 업계는 단순한 회복이 아닌, 구조 재편과 전략 재정립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순자산 대비 바이아웃 분배율

 

엑시트 레코드가 중요…자금 조달 장기화·운용사 간 양극화

지난해 글로벌 PE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자금 조달 경색과 그로 인한 양극화 현상이었다. 국내 시장 역시 상황은 유사했다.

 

특히 이전 펀드의 엑시트 성과가 좋았던 운용사일수록 자금 유치가 수월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낮은 수익률을 기록했던 중소형 운용사들은 목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으로 장기 조달을 이어갔다. 투자자들, 즉 LP들은 이제 더 이상 브랜드나 과거 실적에만 기대지 않고 실질적인 엑시트 실적과 포트폴리오의 회수 가능성을 중심으로 투자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자금 조달의 양극화는 자연스럽게 투자 기회의 집중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PE 시장에서는 일명 ‘스타 매물’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 치열했으며 상위 GP(운용사)들에 거래 기회가 몰리는 현상이 뚜렷했다.

 

시장의 관심을 모았던 주요 자산은 모두 복수의 대형 운용사들이 경합을 벌인 끝에 체결됐다. 이런 흐름은 단기적인 매물 부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구조화된 양극화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수익성과 회수 가능성이 높은 매물을 중심으로 자금과 전략이 집중되면서 투자자산의 가치는 점점 프리미엄화하고 있다.거시 환경의 불확실성도 매물 경쟁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금리 고공 행진, 원화 약세,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상황에서 매도자는 매각 시점을 신중히 조절하며 밸류에이션 극대화를 노리고 있고, 매수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거래에 뛰어드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경쟁은 딜 밸류를 상승시키는 동시에 수익률 확보에는 점점 더 큰 부담을 안기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 형성보다는 ‘이 거래를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심리적 압박이 매수자들에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브아웃’ 전성기는 끝났나

 

카브아웃(carve-out)은 한때 사모펀드의 대표적인 수익 창출 전략이었다. 대기업이 비(非)핵심 자산을 분리 매각하고 이를 GP가 인수한 뒤 비용을 줄이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확보하는 구조였다. 2012년 이전에는 이러한 전략을 통해 평균 30% 이상의 매출과 수익 개선이 가능했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최근 수년간 이 수치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며 특히 마진 개선 효과는 뚜렷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미 시장에 나온 자산들은 구조조정이 대부분 끝난 상태이거나 개선 여력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개선’만으로는 의미 있는 수익률을 내기 어려운 구조다.

 

실제 지난해 국내에서 이뤄진 굵직한 거래들도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전략적 매수자의 의사, 산업 내 구조 개편 흐름, 또는 향후 IPO 기대감에 의해 거래 밸류가 결정된 사례가 적지 않다. 운용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기업의 내재가치를 끌어올리는 사례보다는 시장 타이밍과 외부 수요에 따라 거래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비용 절감’을 큰 축으로 하는 전통적인 밸류업 전략의 유효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밸류업 전략의 정교화가 중요한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비용 절감뿐 아니라 매출 성장과 마진 확보, 브랜드 강화와 제품 믹스 최적화 등 보다 복합적인 전략을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는 운용사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사모(私募)’ 조달의 성격이 바뀐다

 

사모펀드 업계의 구조는 또한 자금 유입 경로의 변화라는 새로운 축 위에서 재편되고 있다. 과거에는 연기금, 보험사 등 전통적인 기관투자가들이 주요 자금 공급원이었지만 지금은 그 중심이 바뀌고 있다.

 

향후 5년간 사모펀드로 유입될 신규 자금의 40%가량은 초고액 자산가, 패밀리 오피스, 리테일 기반 투자자 등 프라이빗 웰스 부문에서 유입될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실제로 블랙스톤은 BXPE라는 개인투자자 대상 펀드를, 아폴로는 토큰화 상품을, 피델리티는 사모 신용 기반 상품을 출시하며 이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공공 시장과 사모 시장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그 흐름은 빠르게 한국 시장에도 확산할 조짐이 보인다.

 

이러한 구조 변화는 현재까지는 대형 운용사에 유리하다. 복수의 투자자 유형을 대상으로 다양한 상품군을 구성하고 맞춤형 투자 솔루션을 제공하려면 자산운용뿐 아니라 브랜드, 마케팅, 규제 대응, 시스템 운영 등 전방위적인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딜 소싱에 필요한 산업별 데이터 모델, LP별 요구에 맞춘 운용 보고 체계, 내부 자동화된 투자 심사 및 보고서 시스템까지 갖춘 운용사는 단순한 거래 성사율뿐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전통 모델의 붕괴와 인공지능 등장

 

이런 상황에서 최근 등장한 생성형 AI는 기존 펀드 전략을 뒤흔들 수 있는 새로운 게임체인저로 주목받고 있다. AI 기술은 이제 딜 소싱과 실사, 가치 창출, 회수 전략 전반에 걸쳐 적용되고 있다.섹터 트렌드 분석, 고객군 세분화, 리스크 자동 탐지, 마진 변동 예측, 마케팅 전략 최적화 등 복잡하고 반복적인 작업에 AI가 도입되면서 팀당 커버 가능한 거래량과 속도, 정밀도 모두가 달라지고 있다.

 

일부 운용사는 실제로 R&D 분석, 시장 조사, 투자제안서 작성, 내부 보고서 자동화 등 전 단계에 AI 기술을 도입하며 본격적인 실험에 들어갔다. 이제는 수작업 중심의 밸류업 설계에서 벗어나 데이터 기반 예측 모델이 전략을 제시하는 단계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지금의 변화는 단기 트렌드가 아니다. 회수 지연, 전통 전략의 약화, 자본 유입 구조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한국 사모펀드 시장은 단순한 회복 국면이 아니라 본격적인 구조 전환기에 진입했다.

 

베인 분석에 따르면 앞으로 5~10년 사이에 사모펀드 업계는 자산 규모 중심의 대형 운영사, 정밀 전략 중심의 알파 GP, 글로벌 LP와의 맞춤형 파트너십 모델 등 다양한 형태로 분화될 가능성이 높다. 펀드 규모, 전략 정교함, 기술 역량, 자본 유치 다변성 등 여러 축에서 경쟁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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