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연속 1000만 관객 예고한 KBO
자체매출 늘어나는 구단들
미국 메이저리그(MLB)는 세계 최대 프로야구 리그다. 그런 MLB 관계자들이 부러워하는 리그가 하나 있다. 한국프로야구 KBO리그다. 비가 오고 폭염경보가 내려져도 관중석이 가득 차는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야구장은 항상 열기에 휩싸여 있다. 떼창과 샤우팅은 스타들의 콘서트장 못지않다.
또 하나 젊은 팬들이다. 2030이 대거 야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베이스볼 이코노미’는 야구장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변 상권 매출은 야구 시즌에 급증한다.
지역 명소는 야구장 방문 때 들르는 관광코스가 되며 지역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야구 관련 굿즈와 응원용품 판매는 급증했고, 기업들은 앞다퉈 KBO와 협업하며 베이스볼 이코노미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온라인에선 팬들이 제작한 야구장 관련 브이로그와 숏폼 등 야구 관련 콘텐츠가 또 다른 팬을 모으는 선순환의 매개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야구의 열기는 적자로 얼룩졌던 야구단의 재무제표 색깔마저 바꿔놓고 있다.
그 시작은 야구장이다. 3월 말 개막 이후 야구장에 빈자리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221경기가 매진됐고 평일 좌석 점유율도 83.6%에 달한다. 매일 10만 명 정도의 야구팬이 직관을 위해 5개 야구장으로 몰려가고 있는 셈이다.
KBO리그는 올해 최단 경기 만에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2년 연속 ‘10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뒀다. 1200만 명이 찾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콘텐츠 시장 판도까지 바꿨다. “라이브 콘텐츠의 왕좌를 차지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프로야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1. 돈 버는 구단
관중이 늘자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야구단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지난해 10개 KBO리그의 한 해 매출은 6925억원이었다. 7개 구단이 역대 최고 매출 기록을 세웠다. 코로나19 직전이던 2019년과 비교해 32% 성장했다.100억원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한 구단도 있었다. 지난해 롯데 자이언츠와 두산 베어스는 나란히 118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수익 구조도 달라졌다. 그동안 모기업의 지원이 아니면 적자가 당연했던 스포츠에서 다양한 수익모델로 이익을 내는 어엿한 산업으로 발전했다. 과거 재벌의 사회공헌 성격이 강했던 구단 운영은 이제 콘텐츠 비즈니스로 업의 본질이 전환되고 있다.
KBO리그 10개 구단이 특수관계에 있는 모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고 내는 ‘자체 매출’은 2023년 3823억원에서 2024년 4581억원으로 1년 만에 20% 성장했다.
자체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꾸준히 늘었다. 2015년 50.8%였던 리그 전체 자체 매출 비율은 지난해 67.5%까지 상승했다. 구단의 자생력이 높아진 것이다. 굿즈 등 파생상품 판매액, 중계권료 등을 합치면 올해 처음으로 KBO리그 연매출이 7000억원을 돌파할 것이 확실시된다.
구단이 돈을 벌게 된 가장 큰 변화는 입장수익의 증가다. 관객이 늘자 2019년 858억원이었던 입장수익은 2023년 처음으로 1233억원을 찍으며 1000억원의 벽을 깼고, 지난해 1595억원의 수익을 냈다.
롯데 자이언츠는 지난해 입장 매출이 전년 대비 32% 늘었다. 입장객이 급증하자 광고 매출이 20%, 상품 매출이 80% 늘며 파생 효과를 낳았다. 지난해 입장수익으로 가장 큰돈을 번 구단은 LG 트윈스다. 작년 단일 시즌 홈 최다 관중 신기록을 세운 LG 트윈스의 입장수익은 208억1146만4595원으로 10개 구단 중 유일하게 200억원 이상을 기록했다.
굿즈 등 파생상품 판매액도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기아 타이거즈의 유니폼 등 굿즈 매출은 지난해 전년 동기 대비 350% 성장하며 매출 상승을 이끌었다. 특히 지난해 연봉 1억원이었던 김도영 선수의 유니폼은 110억원어치가 팔렸다. 한 선수만의 유니폼으로 이룬 성과다. 기아 타이거즈 관계자는 “올해도 팀스토어에 방문하는 여성 관중이 많이 늘어났고 6월 말 기준으로 전년 동월 대비 152% 매출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다른 구단들 역시 올해 더 다양한 굿즈를 판매하면서 매출 상승을 기대하고 있다. LG 트윈스는 올해 상반기 온라인몰과 오프라인 매장 모두 상품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2024년 대비 상품 수익이 88% 뛰었다. 한화 이글스도 성적이 반등하면서 올해 지난해 대비 유니폼 판매 수량과 매출이 250% 이상 급증했다고 밝혔다.
2. 2030의 유입
야구 흥행의 주역은 2030 여성 팬덤이다. 2024년 프로야구 여성 관객은 전체의 55.5%를 차지하며 남성 관객을 넘어섰다. 특히 20대 여성 관람객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성 팬층의 급증이 단순한 매출 확대를 넘어 야구가 IP 기반 콘텐츠 산업으로 진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브랜딩과 마케팅 전문가인 한주영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교수는 “과거 야구가 지역 연고로 중장년층 남성을 주된 소비자로 뒀던 스포츠였다면 최근에는 2030 여성 팬층이 급증하면서 문화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진단했다.특히 여성들이 콘텐츠의 재생산과 소비의 확장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한 교수는 “2030 여성을 중심으로 커뮤니티와 팬덤이 구축되면서 패션, 뷰티, 라이프스타일 등으로 야구와 접목할 수 있는 콘텐츠 영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야구장에 발을 디딘 젊은 세대들이 떠나지 않게 야구 경기라는 서비스의 품질을 높인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그들은 지루한 것을 싫어한다. KBO는 야구가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올해부터 제한 시간 내에 투수가 던지도록 한 피치클락 제도를 도입했다. 타자도 이유 없이 타석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 시간을 단축했다. 12회였던 연장도 11회까지로 줄여버렸다.또 공정성 시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AI가 하는 ABS를 지난해 도입했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한국 프로야구가 유일하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에게 긍정적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야구계의 평가다.
3. K팝과 야구의 상관관계
한국 야구장에는 한 타자가 등장할 때마다 그 선수만을 위한 응원가가 울려 퍼진다. 한국 외에 전 세계 어느 야구장에서도 개별 선수의 응원가는 나오지 않는다. 응원가가 야구장을 벗어나기도 했다. LG 트윈스 홍창기 선수 응원가는 노래방 기기에 등록돼 있어 노래방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애창곡이 됐다. 팬덤 형성을 위한 구단의 투자가 결실을 거둔 셈이다.
야구에 여성 관객이 늘어난 이유를 뚜렷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두고 ‘돌판 문화’가 이식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K팝으로 단련된 ‘팬덤’ 문화가 야구에 그대로 옮겨갔다는 해석이다.
야구가 IP 비즈니스로 자리 잡은 것 또한 아이돌 팬덤의 주축이 되는 여성팬들이 야구장으로 옮겨간 덕이 크다. K팝과 야구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미래 가치가 ‘사람’에 달려 있다. 잘 키운 아이돌 그룹 하나가 엔터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듯, 잘 키운 선수가 구단의 분위기를 바꾸고 좋은 성적을 내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그 팬덤에 따른 수익은 플러스 알파다.
야구와 K팝 모두 팬덤의 화력이 숫자로 나타난다. 인기가 있다고해서 구단의 승률이 높아지는 건 아니지만 팬덤의 충성도가 높을수록 구단의 상품 매출과 입장수익이 증가한다. K팝 아이돌이 앨범 판매량, 콘서트 횟수 등으로 수익을 내는 구조와 비슷하다. 아이돌과 선수가 우상인 동시에 육성의 대상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소속감을 가지고 응원하는 문화 역시 비슷하다. 내가 응원하는 야구 구단의 성적이 떨어지면 해당 구단의 팬들이 가장 호되게 비난한다. K팝 팬덤 역시 소비자에서 벗어나 아이돌의 성장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4. ‘숏폼’ 생산 기여한 티빙
콘텐츠 재생산에 막대한 역할을 한 건 티빙이다. KBO는 지난해 CJ ENM 산하 OTT인 티빙과 뉴미디어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경기 영상의 2차 저작물을 허용하는 조건이었다.
이전에는 저작권을 가진 뉴미디어 중계권자 외에는 야구 경기 관련 동영상을 포털이나 유튜브에 올릴 수 없었다. 콘텐츠를 재생산할 수 있는 경로가 아예 막혀 있던 것이다.
규제가 풀리자 KBO와 10개 구단은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KBO 리그 경기 장면이 포함된 다양한 콘텐츠를 폭넓게 제작했다. 새로운 수익 창출의 길도 열렸다.일반 야구팬에게도 빗장을 풀었다. 40초 미만 분량의 경기 영상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티빙이 콘텐츠 규제를 풀자 야구 인기도 급상승했다.
팬들과 구단은 경기 영상뿐만 아니라 경기장 내의 다양한 이야기를 재가공해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올해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에 가면 수많은 야구 영상들이 돌아다니는 이유다.
기아 타이거즈 치어리더들이 화장을 수정하다 ‘삐끼삐끼’ 춤을 추는 영상 역시 역시 티빙의 재가공 허용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 영상이 유튜브, 인스타, X 등으로 퍼지며 20대 여성 팬들의 유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티빙이 계약을 하기 전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야구 시장이 가라앉던 와중에 유료 플랫폼으로 중계권이 이전되면 야구팬들의 장벽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티빙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즐기던 20대 여성팬층의 유입이 오히려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올해 3월 KBO리그 개막전 시청 연령층 분석 결과 20대(31%)가 가장 높았고 30대(25%), 40대(23%)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중 여성 비율은 48%에 달했다. 민선홍 티빙 콘텐츠총괄은 “티빙 입장에서 스포츠는 생중계 특성 상 매일 충성도 높은 사용자를 대규모로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콘텐츠다”며 “팬과 구단 모두에게 경기 영상 활용 제약을 과감하게 풀면서 관람객들이 단순히 야구 콘텐츠의 ‘시청자’가 아니라 ‘확산자’가 될 수 있도록 했고 이는 팬덤의 외연을 넓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4. GDP 3만 달러 시대의 야구
야구 경기를 보러 오는 관중들은 경기의 승패보다 경기장의 ‘분위기’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 이들에게 야구란 영화관 티켓 가격에 먹고, 놀고, 소리 지르며 3시간 이상 보낼 수 있는 하나의 레저다.
기아 타이거즈 팬 이민영 씨는 “야구가 개막하면 경기를 보는 것보다 더 강한 도파민을 주는 건 없다”며 “무더운 날씨에도 야구장을 찾는 이유는 응원 문화와 먹거리, 팬들과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BO가 2024년 7월 20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방문객 중 “응원팀 성적과 관련 없이 경기장을 찾는다”는 응답자가 56%나 됐다. 이들이 경기장을 찾는 이유는 응원문화가 재미있어서 49.3%, 가족이나 지인의 권유로 39.2%, 나들이·데이트 목적으로 31.1%, 치맥 등 음식 문화가 좋아서 29.4%, 다른 놀거리 대비 비용이 적당해서 26.2% 등이었다(복수응답).
이처럼 야구장은 단순한 스포츠 관람을 넘어 ‘문화 소비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민선홍 티빙 콘텐츠총괄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스포츠를 소비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며 “삶의 여유가 생기며 승패보다는 문화적 경험으로서 스포츠를 즐기는 팬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프로야구는 이기고 지는 데 모든 걸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역전패를 당한 후 야구단 버스에 불을 지른 사건들은 한국 프로야구의 흑역사로 남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젊은 세대들은 프로야구를 경기와 동시에 경험으로 즐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치열한 순위싸움
치열한 순위싸움도 올해 야구팬들을 구장으로 끌어모으는 요인이다. 야구는 팬들의 참여도가 높은 스포츠다. 커뮤니티에서는 “야구팬은 1년 내내 화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팀당 144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우승팀 팬들도 승률 7할을 하더라도 최소 43경기는 패배를 목격해야 한다. 경쟁이 치열해 승률 6할을 갓 넘기고 우승할 경우 55게임 정도는 질 수밖에 없다. 특히 올해는 순위싸움이 다른 해보다 훨씬 치열하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할 서너 팀이 대략 정리되고 1위 팀이 독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올해는 다르다.
8월 6일까지 경기를 기준으로 1위 한화와 2위 LG의 승차는 없다. 우승팀의 향방은 오리무중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3위 롯데는 1위와 4게임 차에 불과해 정규리그 우승에 대한 욕심을 놓치 않고 있다.
포스트시즌에는 5개 팀이 진출하는데 이 동네는 더욱 혼전이다. 4위 SSG부터 8위 삼성까지는 3.5경기 차이에 불과하다. 자고 일어나면 4, 5, 6위의 순위가 뒤집어지고 한 주가 지나면 4위가 8위가 될 수도 있는 게임차다. 9위로 처져 있는 두산과 8위 삼성의 게임차도 4.5게임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40경기 가까이 남아 있기 때문에 꼴찌 키움을 제외하면 모든 팀이 가을야구를 꿈꿀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치열한 경쟁은 야구장을 매일 매진 행렬로 이끌고 있다. LG 홈경기는 총 48경기 중 29경기가 매진됐고 7월 말까지 100만 명 넘는 관중이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롯데 자이언츠 홈인 사직구장에도 올해 전반기까지 96만 명이 방문했다. 특히 4월 24일부터 6월 19일까지는 22경기 연속 매진을 기록했다.
한화 이글스 대전한화생명볼파크는 전반기까지 43번의 홈경기를 치렀는데 이 중 39경기가 매진됐다. 단 4차례를 빼고 모든 좌석이 꽉 찬 것이다.
한화 이글스 관계자는 “4월 10일 9위로 탈꼴찌에 성공한 이후 한화 이글스는 8연승과 33년 만의 12연승을 기록하는 등 돌풍을 일으켰고 결국 전반기를 1위로 마감했다”며 “성적이 뛰자 팬들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한화 이글스 유튜브 ‘이글스TV’는 LA 다저스를 제치고 전 세계 구독자 1위 스포츠 구단 계정이 됐고, 홈·원정 가리지 않는 관중몰이에 대전 마스코트와 협업한 ‘꿈돌이’ 유니폼이 전국 곳곳에서 눈에 띄며, 대전 브랜드 확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