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국 원전 확충을 위해 시공 역량이 뛰어난 한국의 참여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우리 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K원전 협력이 핵심 의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국수력원자력과 웨스팅하우스는 지난 1월 지식재산권 분쟁 해소를 계기로 미국, 유럽 등 선진 시장을 중심으로 다시 커지는 원전 시장을 '팀 코러스'(Team Korea+US) 차원에서 공략하기 위한 합작회사(조인트벤처)를 만드는 논의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1일 통상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이뤄진 한미 에너지 당국 접촉 과정에서 미국 고위 당국자는 우리 측에 자국 내 원전 확대 계획을 소개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밝혔다.미국 측은 한미 기업 간 지재권 분쟁이 해소됐고, 양국 정부 간에도 철저한 수출 통제 원칙 준수를 바탕으로 원전 협력 공감대가 마련돼 협력 여건이 조성됐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이 제3국 시장보다 원전 확충 문제 해결이 시급한 미국에 와 원전을 지어주기를 희망한다는 취지로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화석연료 경제 부활과 더불어 원전의 대대적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2050년까지 현재 약 100GW(기가와트)인 원전 설비용량을 400GW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신규 원전 인허가 기간도 18개월로 대폭 단축했다. 미국이 추가로 짓겠다고 한 300GW는 1GW 기준으로 하면 원전 약 300기 분량에 해당한다.트럼프 행정부는 당장 2030년까지 10기 원전을 착공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업계에서는 이마저도 전례 없는 많은 물량으로 사업자 선정부터 자금 조달, 실제 착공까지 실현 과정에 상당한 도전 요인이 있을 것으로 본다.
트럼프 행정부가 사실상 도움을 요청한 것은 미국이 설계 등 원천 기술 강국임에도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신규 건설 인허가가 장기간 중단되면서 자국내 공급망이 사실상 붕괴했기 때문이다.
원천 설계 기술을 가진 웨스팅하우스의 경우 지식재산권을 가졌지만 시공 역량이 없어 반도체로 치면 '팹리스 기업'처럼 됐다. 실제 대규모로 원전 건설을 하려면 시공, 기자재 조달, 운영 과정을 주도할 사업 파트너가 필요하다.
이 같은 상황은 미국이 자국 내 공급망 붕괴로 한국의 절대적 도움을 기대하는 조선 산업과 유사하다. 이에 한국 원전 산업이 미국의 수요를 바탕으로 미국에 본격 진출할 수 있다면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와 같은 전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이런 배경에서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합작회사를 꾸려 미국 등 주요 원전 시장에 공동 진출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양사는 출자 규모 및 비율, 사업 대상 등을 놓고 구체적 협의를 진행 중이다. 다만 타결 임박 단계에는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원전 업계에서는 합작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한국이 시도조차 못 한 미국 시장 진출 길이 열린다면 건설, 기자재 등 한국 원전 기업에 전에 없던 새 기회의 창이 열릴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다만 합작 법인 설립을 통한 우회 진출이 성사돼도 지분 비율 등에서 주도권을 웨스팅하우스에 내어준다면 '제2의 굴욕 협상'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히 있다. 실제 현재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사업 주도권 등 세부 내역에서 아직 견해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한편, 트럼프 행정부가 원전 확대 목표 달성을 위한 한국 역할에 기대를 건 가운데 오는 25일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에서도 원전 협력 방안이 의제로 오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양국은 관세 협상 타결 과정에서 한국이 원전 분야를 포함해 2000억달러 규모의 투자 지원 패키지를 조성하기로 합의한 상황이다. 이에 반도체, 2차전지, 조선 등 전력 산업 협력 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원전 협력을 구체화하자는 논의가 오갈 수도 있다.
업계에서는 황주호 한수원 사장이 대통령 방미 앞인 23일 출국하기로 한 것도 정부 간 원전 협력 논의와 관련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황 사장은 이번 방미 중 웨스팅하우스 고위 관계자를 만나는 일정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수원과 함께 한국의 원전 수출 사업을 맡는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도 대통령 방미를 계기로 21일 출국해 웨스팅하우스 고위 관계자와 별도의 면담을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