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추억의 단어가 될 겁니다.”
최근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코스피 활약에 펀드매니저 A 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9월 정기국회에서 ‘3차 상법 개정안’이 예정대로 통과된다면 ‘코스피 5000으로 가는 길’이 마침내 현실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지난 7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1차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 전체로 넓혔고, 8월 국회를 통과한 2차 개정안은 대기업에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며 소액주주 권한을 키웠다.이제 3차 개정안의 핵심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다. 자사주가 무엇이길래 ‘코스피 5000으로 가는 길’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것일까.
1위. 한국의 주가 지수가 9월 들어 주요 국가 지수 중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9월 1∼15일 코스닥 지수의 수익률은 7.00%, 코스피 수익률은 6.95%를 기록했다.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주요 국가의 대표 주가 지수 40개 중 수익률로 1, 2위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하에 전 세계적 유동성 장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의 증시 상승률은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새 정부 들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코리아 프리미엄’ 기대감이 커진 영향이다. 증권가는 특히 9월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핵심으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코스피 지수가 새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김병연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올해 말 현재 지수보다 높은 사상 최고치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며 “9월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매입 소각 의무화 등 세부 논의에 따라 추가적인 방향성이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고주’ 자사주가 뭐예요
‘코리아 프리미엄’의 백미로 꼽히는 자사주는 회사가 스스로 발행한 주식을 다시 사들여 보관하는 주식을 뜻한다. 회계 용어로는 ‘자기주식’이지만(재무제표에서도 자기주식을 쓴다) 시장에서는 주로 자사주라는 표현을 쓴다.
지금이야 자사주를 보유하지 않은 기업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처음 상법에 등장했을 땐 금기(禁忌)였다. 기업이 자기주식을 들고 있으면 불공정 거래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본 것이다. 그러다 1994년 자사주 취득이 사실상 배당과 같은 효과를 낸다는 점이 인정되면서 조건부로 금지가 풀렸다.자사주를 이해하려면 크게 두 가지 쓰임새를 알아야 하는데 ‘매입’과 ‘소각’이다. 매입은 말 그대로 회사가 자기 돈으로 자기 회사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다. 임직원에게 줄 스톡옵션 물량을 확보하거나 주가가 단기간에 급락했을 때 주가 방어용으로 쓰인다. 대주주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자사주를 직접 사들이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선 보통 후자로 쓰여 ‘자사주의 마법’이란 용어가 생겨났다.
반면 소각은 더 직접적인 주주친화적 방식이다. 회사가 사들인 주식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 수가 줄어들고 남은 주주들의 몫은 커진다. 같은 파이를 더 적은 사람이 나눠 갖는 셈이니 1주당 가치가 올라간다. 그래서 자사주 소각은 배당과 함께 ‘주주환원의 정석’으로 불린다. 실제 자사주 소각은 주당이익(EPS)이 늘고 자기자본이익률(ROE)도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
배당은 현금으로 돌려받는 만큼 즉각적이지만 세금을 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자사주 소각은 배당 못지않은 효과를 주면서 세금 부담은 덜하다. 그래서 글로벌 기업들도 배당보다 자사주 매입·소각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기업가치에 비해 주가가 과도하게 저평가돼 있을 때 자사주 소각은 시장 가격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자주 쓰인다.
‘자사주 소각’ 역전의 한 해
한국에서 자사주는 일반 주주에겐 그리 매력적인 주가 방어책이 아니었다. 기업은 ‘주주환원 카드’보다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더 자주 자사주를 꺼냈다. 소각이 아닌 매입에 치중했다는 뜻이다.
자본시장의 정상화를 외치는 이들은 ‘한국 기업과 자본시장이 글로벌 스탠더드(기준)를 무시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대표적 사례’로 자사주를 들었다.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이 주가 방어를 위해 대규모 자사주 매입·소각 계획을 발표해도 주가 반응은 신통치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미 시장이 선반영했거나 매입에 그치고 실제 소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사주 소각액이 취득액을 웃도는 ‘역전 현상’이 나타날 전망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2년만 해도 자사주 취득액(6조5000억원)이 소각액(3조1000억원)의 두 배를 넘었다. 기업들이 자사주를 사들여 보관만 하고 소각까지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는 의미다. 이 격차는 증시 정상화를 위한 ‘밸류업 프로그램’이 가동되며 소각 규모가 커진 2024년(취득 18조7000억원, 소각 13조9000억원)에도 여전했다.올해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7월까지 집계된 취득액은 16조원 수준에 머물렀지만 소각액은 18조3000억원으로 이미 역전됐다. 8월 들어 HMM·메리츠금융지주·네이버 등이 추가 소각을 결의하면서 하반기 격차는 더 벌어질 전망이다. 규모도 사상 최대다. 소각액은 7월까지 이미 지난해 연간 규모(13조9000억원)를 넘어섰고 8월 취득액을 더하면 20조원 돌파가 예상된다.
“막차 그만”…‘더 센’ 상법 개정안
국내 자사주 역사에도 첫 분기점이 될 기록들은 이재명 정부의 강력한 증시부양책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한국 증시 정상화를 위한 ‘밸류업 프로그램’과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으로 자사주 매입·소각 규모가 큰 폭으로 늘었지만 자사주 소각을 강제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부터 줄곧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명문화와 전자주총 의무화,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주 이익 환원 강화와 자본시장 불공정행위 근절을 위한 제제 강화 등을 추진하면서 매입과 소각이 급증했다. 새 정부의 ‘주주권익’ 기조에 발맞춰 주주환원에 나선 기업이 늘었지만 1차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 자사주를 취득해 지배력 강화에 나서려는 ‘막차 수요’도 폭발했다.대표적 사례가 태광산업이다. 태광은 지난 6월 이사회에서 보유 자사주 전량(지분율 24.41%)을 교환사채 발행에 활용하겠다고 결정했다.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다시 시장에 내놓는 방식이어서 일반 주주 몫이 희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발행 상대방조차 밝히지 않아 “대주주 지배력 강화를 위한 꼼수”라는 비판까지 불렀다. 사실상 1차 상법 개정 이전의 규제 공백을 활용한 셈이다.
1차 개정안이 7월 초 국회를 통과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 전체로 확대되면서 경영진이 더 이상 주주가치를 외면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됐다. 특히 개정안이 통과된 7월 한 달에만 자사주 매입액이 6조5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삼성전자가 7월 8일 이사회에서 3조9119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의결했으며 같은 달 신한지주(8000억원), KB금융(6600억원), 기아(3500억원), 하나금융지주(2000억원), 현대모비스(1100억원) 등 주요 대기업들이 잇따라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현재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코스피 지수는 이 같은 정책효과가 집약된 결과로 볼 수 있다.
9월 정기국회에서는 3차 상법 개정안이 대기 중이다. 시장과 기업에선 이를 ‘더 센’ 개정안이라 부른다. 핵심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 관련해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김현정 의원과 김남근 의원, 조국혁신당의 차규근 의원 등 5인이 각각 법안을 대표 발의한 상태다. 법안마다 신규 자사주 즉시 소각부터 기존 보유분 5년 유예 등 편차가 크다. 가장 강력한 안은 자사주를 원칙적으로 취득 즉시 소각하도록 규정한 김현정 의원안이다. 김남근 의원안은 자사주 의무 소각 기한을 1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차규근 의원의 개정안은 소각 기한을 6개월로 했다.시장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8월 말 개정안 논의가 본격화되자 자사주 비중이 높은 지주사와 금융업종 주가가 일제히 튀어 올랐다. SK(+14%), LS(+9.5%), HD현대(+7%) 등이 대표적이다. 9월 들어서는 외국인 매수세까지 겹치며 코스피가 3400선을 돌파, 주요국 증시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전대미문의 국면이다.
“기업 성장 없이는…” 속타는 상장사
주주는 환호했지만 기업 입장은 ‘날벼락’이다. 대응 카드는 셋으로 압축된다. 정책 시행에 따른 혼란에 대비하기 위해 자사주 비중을 미리 줄이거나 기취득 물량을 활용해 교환사채(EB)를 발행 중이다. 특히 EB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기취득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 공시는 13건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5월 이후에만 26건이 쏟아졌다. 소각 의무화 전까지 자사주를 ‘현금화’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이 집중된 것이다. DB하이텍, 비에이치, 쎄니트, 큐알티 등 22곳이 EB 발행을 공시했다. 시장에선 이 같은 EB 러시를 “3차 상법 개정안(자사주 소각 의무화)을 앞둔 막차”로 해석한다.
마지막 카드는 업계 단체를 통한 반론 제기에 나서는 방식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9월 16일 발표한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의 문제점 연구’ 보고서에서 “자기주식 소각을 의무화할 경우 자본시장 발전에 역행하고 부작용만 초래할 수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소각이 강제되면 기업이 아예 자사주를 취득하지 않게 되어 주가 부양 효과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 해외 경쟁기업들은 자사주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점, 경영권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보다는 처분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도 우려를 표했다. 정우용 정책부회장은 “주가지수 5000 시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기업 성장 없이 지수만 오르는 일은 불가능하다”며 “개정안은 자사주가 경영상 실무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스톡옵션 행사, 합병·구조조정, 자금조달 등 자사주의 다양한 활용 방안을 예로 들며 “미국 등 해외에선 금고주 형태로 보유하다가 여러 목적으로 활용하도록 허용하되 주주 이익 보호를 위해 처분 시에는 신주 발행과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부회장은 또 “배당가능이익 한도 내에서 취득한 자사주는 소각해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자사주까지 의무 소각하도록 하는 것은 상법상 감자 절차와 충돌한다”며 “현행 법체계와의 정합성에 대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에 명확한 행동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보장하는 제도 개선만이 지속적인 성장과 주가지수 상승을 견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 친화적 정부의 선택은
논란이 확산되자 정부는 중립기어를 박았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9월 17일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에 대해 “관련 기관의 의견과 시장의 반응을 봐서 종합적으로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구 부총리는 “기업에서는 자사주 소각하게 되면 경영권 방어가 어렵다고 한다. 시장에서는 일반 주주의 권익 보호나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서는 자사주 소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래서 저희는 두 가지 의견을 잘 듣겠다”고 언급했다.3차 상법 개정안 열차는 목적지를 향해 덜컹덜컹 달리고 있다. 1, 2차 전례로 볼 때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결국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김병연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현 정부는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금융시장으로 옮겨 생산적 자본 선순환을 유도하는 전략을 택했다”며 “‘대주주 양도소득세’ 철회 등으로 시장 친화적이고 효율주의적인 입장이 재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코스피 레벨업은 가계 자산 이동을 위한 상징적 목표”라며 정부 입장 변화에 대한 우려는 남아 있으나 구조적 목표를 고려하면 증시 활성화가 필수적이란 의견이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압박 수위를 높였다. 9월 10일 공정위는 올해 지정된 92개 공시대상기업집단의 주식 소유 현황을 공개하며 5월 1일 기준 자사주 비율이 5% 이상인 상장사를 낱낱이 지목했다. 전체 40개 집단 71개사가 목록에 올랐다. 미래에셋생명(34.2%), 롯데지주(32.3%), 티와이홀딩스(29.2%), 인베니(28.7%), SK㈜(24.6%)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