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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 탓에 실패 경험은 공유되기 어렵고, 기록으로도 잘 남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패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여러 창업가가 공유한 경험을 종합하면, 한국 스타트업이 흔히 빠지는 함정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스타트업이 빠지는 5가지 함정

미국 위워크는 공격적인 글로벌 확장을 추진했지만 재무 구조가 급격히 악화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실패를 겪었다.
미국 위워크는 공격적인 글로벌 확장을 추진했지만 재무 구조가 급격히 악화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실패를 겪었다.

 

1. 돈을 ‘목표’로 오해한 대가

 

자금은 모든 기업에 ‘혈액’과 같다. 근사한 비즈니스 모델과 비전을 가졌더라도 자금 흐름이 막히면 생존하기 어렵다. 스타트업 실패 원인 중 가장 빈번하게 꼽히는 요인 역시 자금 문제다. 그러나 실패의 본질은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돈의 성격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로 라우터(네트워크 연결 장치)를 개발해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 강국이 되는 데 기여한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회장은 ‘4전 5기’의 기업인이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2001년 IT 버블 등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며 회사를 매각했다가 되찾는 등 파란만장한 길을 걸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매달 30억원의 적자를 감당해야 했다. 남 회장은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 경험 덕분에 다음 위기도 버틸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런 그는 돈을 사업의 ‘휘발유’가 아닌 ‘윤활유’에 비유한다. 윤활유가 없으면 기계가 멈추지만, 윤활유만으로 엔진을 돌릴 수는 없다. 사업의 본질은 사람과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시장과 연결하는 실행력에 있으며, 돈은 그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돕는 역할에 그친다는 분석이다.

 

의외로 많은 창업가가 투자 유치 자체를 ‘성공’으로 오해하고, 투자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에 빠진다. 하지만 투자는 약속일 뿐 확정된 자산이 아니다. 음식 정보 커뮤니티 ‘오늘 뭐 먹지’와 동영상 레시피 채널 ‘쿠캣’을 성장시킨 이문주 쿠캣 대표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고 통장에 입금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투자 유치를 확신하고 조직을 확장했다가 자금 집행이 미뤄지면서 존폐 위기를 맞았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유정수 글로우서울 대표 역시 “투자자 돈은 내 돈이 아니다”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외부 자금에만 의존한 성장은 시장에서의 자립 기반을 약화시킨다. 단기 현금흐름은 개선될지라도 수익 구조가 검증되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자금은 ‘목표’가 아닌 ‘수단’이며, 자금 흐름을 통제하지 못하는 조직은 사업 모델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2. ‘슈퍼맨 CEO’의 함정

 

스타트업 초기에는 창업가의 비전과 추진력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조직 규모가 커질수록 ‘창업자 중심 구조’는 한계에 부딪힌다. 리더 한 사람의 판단이 회사 전체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구조는 오히려 큰 리스크가 된다.

 

이문주 대표는 창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팀’을 꼽는다. 자신과 다른 역량, 즉 개발, 마케팅, 기획 등 각 분야 전문가가 모여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 창업가가 모든 결정을 직접 내리려 하면, 조직은 ‘1인 역량’ 안에 갇히게 된다.

 

‘경리나라’로 유명한 웹케시그룹의 석창규 회장은 2017년 시스템통합(SI) 사업에서 철수한 경험이 있다.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의 정보 시스템을 개발해주는 SI 사업은 전형적인 일회성 ‘노가다’ 비즈니스로, 진행할수록 손해가 쌓이는 구조였다. 석 회장은 연매출 400억원대의 ‘마약 같은’ SI 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대신 반복 구매가 일어나는 경리나라, 브랜치, 인하우스뱅크에 전력투구했고, 이는 오늘날 웹케시를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석 회장은 “CEO 확신이 시장 반응과 다를 때가 많다”고 지적한다. CEO가 한 사업에 꽂히면 확신은 편향이 되고, 편향은 냉정한 데이터 분석을 가린다는 뜻이다.

 

“오너가 모든 경영을 직접 챙기면 직원이 성장할 기회를 잃는다”는 조성경 쥬비스다이어트 창업자의 회고도 같은 맥락이다. 리더의 역할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슈퍼맨’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가 역량을 발휘하도록 판을 짜는 ‘조율자’에 가깝다. 스타트업 성장 곡선은 CEO 개인의 능력보다, 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권한을 위임하고 신뢰의 구조를 세우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3. 고객은 학생 아닌 심사위원

 

혁신가일수록 ‘우리가 더 잘 안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문제는 고객이 그 ‘정답’을 원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디지털 콘텐츠 유료 소비 개념조차 낯설던 2015년, ‘퍼블리(PUBLY)’는 전례 없는 비즈니스 모델로 시장에 등장했다. 전문가와 현업인을 필진으로 내세워 유료 콘텐츠 시장의 문을 열었고, 이후 6개의 서비스를 출시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네 차례의 투자 유치를 통해 이룬 가파른 성장세는 성공 스토리의 전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박소령 퍼블리 창업자는 회사가 주목받던 순간조차 내부에서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혼란이 반복됐다고 회고한다. 그는 “고객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이 아니라 고객을 계몽하려는 제품을 만들었을 때 잘못된 결정이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팀은 사용자가 원하는 기능보다 ‘이렇게 써야 한다’는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고객이 원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효용’이었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기업의 수익은 고객 요구를 바꾼 결과가 아니라, 만족시킨 대가”라고 말했다. 이는 스타트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장은 논리보다 체감으로 움직인다. 석창규 회장은 “스타트업은 아이디어를 버릴수록 성공한다”며, 고객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작은 타깃’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창업가의 신념을 시장에 강요하기보다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할 때, 비로소 제품과 서비스는 생존력을 갖는다.

 

4. 준비 부족이라는 조용한 적

 

기업의 내부 전략이 아무리 탄탄해도 거대한 외부 환경 변화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다. 정부 정책, 기술 패러다임, 산업 구조의 변화는 신생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전제완 프리챌 창업자는 싸이월드 부진의 원인 중 하나로 정부의 IT 정책을 꼽았다. 2007년 아이폰이 등장했지만, 정부가 ‘시장 보호’ 명목으로 도입을 3년간 지연시킨 탓에 글로벌 기업들이 모바일 생태계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PC 기반 서비스에 머무르는 사이 시장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 창업자는 “그 시점에 국내 콘텐츠 산업의 성장동력이 꺾였다”고 평가했다.

 

‘폴라로이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의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랜드는 즉석카메라라는 획기적인 기술을 선보였지만,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은 ‘찍어서 바로 확인한다‘는 폴라로이드의 핵심 가치를 무력화했다. 그런데도 랜드는 즉석 필름에 집착하며 즉석 영화 카메라인 ‘폴라비전’ 개발에 몰두했다. 그러나 폴라비전은 시장에서 외면당하며 대실패로 끝났다. 결국 폴라로이드는 2008년 필름 생산을 중단했다.

 

이제 거시 환경과 시장 변화를 읽는 감각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초기 스타트업에도 필수적인 경영 자산이 됐다. 스타트업의 실패는 반드시 극적인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위기는 ‘잘 되겠지’ 하는 안일함 속에서 조용히 자란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사업이 재미없어지면 버티기 어렵다”고 말한다. 열정이 식으면 위기 대응 능력도 함께 떨어진다. 그는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할 때 20%를 더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민우 회장은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제로 플랜 B와 C를 준비한다. 조성경 창업자 역시 문제 발생 시 빠른 판단과 실행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는다. 이들의 공통된 조언은 명확하다. 낙관보다 현실, 감보다 준비다. 위기를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대비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기업이 더 많다.

 

5. 확장 중독의 함정

 

많은 스타트업이 ‘성장’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성장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핵심 역량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덩치만 키우는 전략은 한순간에 위기로 바뀔 수 있다. ‘규모 확장’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확장’이 이뤄져야 하지만, 많은 기업이 이 균형을 놓친다.

 

확장 중독은 주로 투자 유치 이후에 나타난다. 투자금을 확보하면 인력, 서비스, 시장 진출을 동시에 늘리는 ‘삼중 확장’이 이뤄지지만, 수익 구조가 불안정한 상태에서의 외형 확대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위워크가 대표적이다. 공격적인 글로벌 확장을 추진했지만, 핵심 사업 모델인 공유 오피스의 수익성이 확보되지 않아 결국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일부 플랫폼 기업이 ‘점유율 확보‘를 명분으로 마케팅과 인력에 과도한 비용을 투입하다 재무 구조가 급격히 악화하는 사례가 반복된다.

 

여기에는 심리적 요인도 크다. 투자자와 시장이 요구하는 ‘성장 스토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외형 팽창이 아니라 수익성 검증, 고객 충성도, 조직 효율성, 브랜드 신뢰 같은 내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확장의 유혹을 경계하는 것은 스타트업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절제의 경영학’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 스타트업은 흔히 ‘경쟁사보다 빨리’ 혹은 ‘더 많이’에 몰두한다. 하지만 이런 경쟁 프레임은 장기적으로 시장 전체를 약화한다. 윤영호 산돌 대표는 “경쟁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경쟁사를 이기려는 전략은 경쟁사가 만든 프레임 안에 갇히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확장 경쟁보다 수익 검증이 먼저라는 조언이다.

 

실패 ‘무사통과’ 위한 4가지 제언

 

실패는 누구나 겪지만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낙인’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크다. 넘어져도 다시 걷는 데 성공한 기업 사이 공통 패턴을 추적하면 실패를 ‘무사통과’하는 방법이 보인다. 과도한 완벽주의를 없애고 실패 장려 문화를 제도화하는 것이 핵심으로 꼽힌다.

실패를 '무사통과'하는 4가지 방법
실패를 '무사통과'하는 4가지 방법

1. ‘완벽주의 함정’ 벗어나야

 

99.5%.

 

2016년 한국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공개한 국가연구개발사업(R&D) 성공률이다. 정부출연 연구기관 과제 2781개 중 실패로 판정된 건 단 13개에 불과했다. 2020년대 들어서도 국가 R&D 사업 평균 성공률은 95%에 달한다.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예를 들어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발주한 프로젝트 지난 10년간 R&D 평균 성공률은 17.8%에 불과하다.

 

자화자찬을 늘어놓기에는 기형적으로 높은 수치다. 처음부터 실패할 리 없는 안전한 목표만 설정했다는 의미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을 향한 완벽주의 탓에 혁신 기회 자체를 제한한 결과다.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안혜정 카이스트 실패연구소 연구조교수는 “세금으로 진행하는 연구가 실패할 경우 책임자가 문책당하고 후속 연구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실패한 과제는 영수증 하나까지 철저한 감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며 “성공률만 높이는 완벽주의에서는 혁신 도전보다 안전한 성과만 좇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극복해낼 실패조차 없는 게 한국 사회 현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패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산이 많지만, 지나친 성과주의와 완벽주의 탓에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틀리면 끝’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너무 안전한 선택만을 추구하게 되고 혁신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광형 KAIST 총장이 2021년 취임과 함께 “성공률 80% 이상 과제는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도 여기 있다. 실패 없는 연구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연구라는 점에서다.

 

완벽주의는 높은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기준에 미달하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불안을 지우고 실패를 거듭해 대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적지 않다. 테슬라는 2008년 로드스터 출시 당시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제품’을 내놓았다. 일론 머스크는 “완벽한 전기차를 만들려고 했다면 아직도 개발 중일 것”이라며 “시장의 피드백이 가장 정확한 R&D”라고 말했다. 로드스터는 수많은 결함을 안고 출시됐지만, 이를 통해 얻은 데이터가 모델S와 모델3로 이어지는 성공 토대가 됐다.

 

다이슨 창업자인 제임스 다이슨은 먼지봉투가 없는 혁신적 진공청소기 ‘사이클론’을 내놓기까지 4년 동안 5126개 실패작을 폐기해야 했다. 다이슨은 “5126개의 실패작은 5127번째 시제품이 제대로 작동하기 전까지 발견·개선 과정의 일부였다”고 회고했다.

 

정부 재창업 지원 정책에서도 과도한 성과주의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지원하는 ‘재창업 성공 패키지’는 완전히 폐업한 사람에는 기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로젝트를 맡은 담당 기관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다 보니, 매출이 있는 사람에게만 지원이 집중된다. 이미 폐업 신고를 해 사업자 등록이 말소됐고, 매출도 없는 이에게는 아예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상하 재도전사관학교 대표는 “투자수익률(ROI) 같은 정량 지표로 정책 효과를 평가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지원 후 성공률을 높이는 데 매몰될 것이 아니라 진짜 재도전 지원이 필요하고 재기 의지가 강한 사람을 선별해 사회 복지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거듭된 실패를 극복하고 결국 큰 성공을 거머쥔 기업 제품이 여럿이다. 사진 왼쪽은 테슬라가 2008년 선보인 초창기 전기차 ‘로드스터’.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당시 의도적으로 미완성된 제품을 내놔 시장 피드백을 받았고, 결국 모델3와 모델S 성공 밑거름이 됐다. 오른쪽은 1990년대 다이슨 초창기 청소기 모델 G-force. 창업주 제임스 다이슨은 4년 동안 5126개 실패작을 폐기한 후에야 첫 제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거듭된 실패를 극복하고 결국 큰 성공을 거머쥔 기업 제품이 여럿이다. 사진 왼쪽은 테슬라가 2008년 선보인 초창기 전기차 ‘로드스터’.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당시 의도적으로 미완성된 제품을 내놔 시장 피드백을 받았고, 결국 모델3와 모델S 성공 밑거름이 됐다. 오른쪽은 1990년대 다이슨 초창기 청소기 모델 G-force. 창업주 제임스 다이슨은 4년 동안 5126개 실패작을 폐기한 후에야 첫 제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2. 실패를 장려하라

 

2010년은 핀란드에 암울한 한 해였다. 핀란드 국민 기업 ‘노키아’가 몰락하며 나라 경제 전체가 휘청였다. 우울한 기운이 감돌던 2010년 10월, 핀란드 수도 헬싱키 알토대 한 학생 동아리에서 정부에 이색 제안을 했다. 실패를 자축하는 ‘실패의 날(Day of Failure)’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감추지 말고 오히려 장려할 때 새로운 혁신이 싹틀 수 있다는 발상에서다. 첫 행사에는 노키아 최고경영자가 기조연설자로 등장해 상징성을 높였다. 행사는 매년 이어졌고, 정부와 기업이 동참하는 국가 캠페인이 됐다. 여러 서구권 국가에서 이를 벤치마킹하면서 10월 13일은 ‘세계 실패의 날’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해외에서는 실패를 축하하고 장려하는 문화가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다. 실패를 드러내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실패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실패로부터 얻을 교훈을 기업 전체나 사회적 자산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실리콘밸리는 2000년대 초반 ‘페일콘(FailCon)’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창업자와 투자자 수백 명이 모여 자기 실패담을 발표하고 서로 격려하는 취지다. 행사는 2014년을 끝으로 사라졌는데 이유가 재미있다. “실패가 너무 당연해졌기 때문에 이런 행사가 별도로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실패는 금기가 아니라 통과의례가 됐다.

 

실패하면 상을 주는 글로벌 기업 사례도 여럿이다. 예를 들어 엑스 디벨롭먼트(전 구글 엑스)는 실패한 프로젝트팀 구성원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보너스를 주고 다음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실패 휴가’를 부여한다. 혼다는 한 해 동안 가장 크게 실패한 연구원에게 ‘올해의 실패왕’을 수여, 한화로 1000만원에 달하는 상금을 지급한다. ‘클래시 오브 클랜’으로 유명한 핀란드 게임 회사 슈퍼셀 역시, 실패에서 배운 게 있으니 축하하고 이를 기념하자는 의미로 샴페인 파티를 연다.

 

국내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2021년 설립한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망한 과제 자랑대회’를 개최한다. 참가자들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왜 망했나’를 스스로 분석하고 발표한다. ‘실패 에세이 공모전’ ‘실패 사진 공모전’도 주기적으로 연다. 실패를 감추기보다는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서로 경험을 공유할 때 두려움이 줄어들고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취지다.

 

조성호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장은 “실패를 드러내는 연습이 극복의 시작이다. 끝내 성공한 사람만이 실패 경험담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건 아니다”라며 “요즘에는 다양한 재단이나 기업에서도 망한 과제 자랑대회나 실패 에세이 공모전을 벤치마킹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3. 실패를 부검하듯 분석하라

 

“똑똑한 실패란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갖고 실패를 분석, 교훈을 얻어내는 것이다. 시험 공부 오답노트처럼, 자신이 뭘 모르는지 또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철저히 들여다보고 탐색해 다음 실패를 줄여나가야 한다.”

 

‘실패를 해낸다는 것’의 저자 최재천 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의 말이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분석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구글 ‘포스트모템(Post-Mortem)’ 제도가 유명하다. 검시관 부검 과정처럼, 크고 작은 장애가 생길 때마다 이를 꼼꼼히 복기하고 분석하는 절차가 제도화돼 있다. 사건 타임라인부터 원인, 사건의 영향,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기록해 전사 공유한다. 중요한 건 비난과 처벌이 없다는 점이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찾는 대신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는 것이 핵심이다.

 

3M은 실패 경험을 세미나를 통해 당당히 공개하도록 권장하는 이른바 ‘실패 세미나’를 연다. “우리가 왜 틀렸는가”를 발표하며 프로젝트 과정에서 잘된 점과 운이 좋았던 점까지 적는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게 20세기 최고 히트상품 중 하나로 꼽히는 ‘포스트잇’이다.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다가, 접착력이 약하고 끈적이지 않는 실패작을 만들었는데 이게 포스트잇이 됐다.

 

미국 항공우주국 나사(NASA)는 허블 망원경 발사 실패 후 실패를 분석하는 전문팀 ‘실패조사위원회(Failure Review Board)’를 꾸렸다. 꼼꼼한 분석과 반성 후에는 전 직원이 실패 원인 보고서를 읽게 한다. 조성호 소장은 “실패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각 실패가 남긴 교훈을 다시 강의·연구로 전환한다”며 “실패 기록은 사회 학습 지능을 높이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이종수 서울대 SNU공학컨설팅센터 산학협력중점교수는 “스타트업이나 사업 여정에서 실패는 불가피하다”며 “중요한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실패로 인한 손실을 얼마나 최소화하고 가치 있는 교훈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추출하는가에 있다”고 말했다.

 

4. 피벗과 자기부정의 기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failure)’라는 단어를 ‘피벗(Pivot)’이라는 말로 바꿔 부릅니다. 빠르게 실패하고 빠르게 학습해 다른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상화돼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경험한 여러 스타트업 창업자가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한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이를 실패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기 검증’으로 여기고 다른 프로젝트로 발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 실패 극복 열쇠 중 하나다.

 

전통 대기업 중에서도 원천 기술을 활용한 신사업 전환으로 재기에 성공한 사례가 많다. 사양 산업으로 변곡점에 도달한 시점에서, 신속한 자기부정과 기존 성공 공식 파괴로 부활한 기업들이다.

 

후지필름은 2000년대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자 빠르게탈필름 선언했다. 필름 기술을 화학·의료·소재로 확장한 결과, 현재는 신사업 비중이 90% 달한다. IBM 역시 2004 주력인 PC 사업을 중국 레노버에 매각했다. 당시에는미쳤다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AI·컨설팅 중심으로 체질을 바꿨고, 현재 매출 70%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서비스에서 나온다. GE 100 가전 사업을 접고 GE에어로스페이스(항공우주), GE버노바(에너지), GE헬스케어(의료기기) 주요 제조사로 독립 체제를 재편해 부활에 성공했다. 소니 역시 TV·PC에서 철수하고 콘텐츠 기업으로 다시 세계 정상에 섰다. 최재천 변호사는작은 승부나 중간 실패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포기하고 우회할 있는회복 탄력성 높여야 한다스스로가 실패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향하는 과정일 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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