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의 마지막 거래일인 12월 30일 주식시장에서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대접받던 2차전지주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날 엘앤에프는 테슬라와 맺었던 3조8000억원 규모의 공급 계약이 사실상 무산됐다는 공시 한 줄에 주가가 9.85% 폭락하며 9만5200원까지 밀려났다.
에코프로(-6.3%), 에코프로비엠(-6.21%), 포스코퓨처엠(-4.93%) 등 양극재 3형제도 일제히 급락하며 연중 최저치를 경신했다. 여기에 SKC가 12월 31일 공시를 통해 2021년부터 추진해온 차세대 양극재 사업 진출 계획을 4년 만에 전격 철회한다고 밝히면서 소재 업계의 투자 심리는 더욱 얼어붙었다.
LG에너지솔루션도 보름 전 포드로부터 9조6000억원대 ‘계약 파기’ 통보를 받은 여진이 계속되며 3% 넘게 하락했다. 계약 해지·축소 및 JV 구조조정까지 포함하면 12월 한 달간 국내 배터리 생태계에서 증발한 수주 계약만 17조원을 넘어선다.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수주 잔고를 앞세워 주식시장을 주도하던 한국 배터리산업은 최근 급변한 시장 환경과 정책 변수 속에서 성장동력이 약화하고 있다. 미국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가 조기 폐지되면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는 경쟁력을 시험받는 국면에 들어섰다.

2차전지주 줄줄이 폭락…보조금 종료에 판매 54% ↓
미국 전기차 보조금 정책 변화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2025년 9월 30일 트럼프 행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전기차 세액공제(최대 7500달러)를 종료하면서 전기차 구매 부담이 크게 늘었다.
세액공제 종료로 차량 실구매가는 차종에 따라 20% 이상 상승한 것으로 추산된다. 보조금 종료 직후인 10월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전월 대비 54% 감소했다. 신영증권은 2026년 미국 전기차 판매가 2025년보다 16%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불과 1년 전 연 20~30% 성장이 가능하다는 기대와 대비된다. 국내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은 전기차 초기 수요를 지탱해온 핵심 장치였다”며 “충전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보조금이 사라지자 소비자들의 구매 유인이 급격히 약화했다”고 말했다.
연비 규제 풀리자 ‘V8 복귀’…GM·폭스바겐, 전기차 ‘유턴’
미국의 연비 규제완화도 완성차 업체들의 전략 수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2031년형 모델 기준 기업 평균 연비(CAFE) 규제를 기존 계획보다 31.5% 낮췄다. 이에 따라 전기차 판매 확대를 통해 연비 기준을 맞춰야 할 부담이 줄었다.
제너럴모터스(GM)는 전략 전환을 공식화한 대표 사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GM은 전기차 모터 생산을 검토하던 뉴욕주 토나완다 공장에 8억8800만 달러를 투자해 6세대 8기통(V8) 엔진을 생산하기로 했다. 대형 SUV와 픽업트럭 등 수익성이 높은 내연기관 차량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재조정한다는 계획이다.메리 바라 GM CEO가 제시했던 ‘2025년 북미 전기차 100만 대 생산’ 목표도 사실상 철회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 전반으로 전략 조정 움직임은 확산하고 있다. 포드는 LG에너지솔루션과의 9조6000억원 규모 배터리 공급 계약을 해지했고 상용차 전문 브랜드인 FBPS 또한 수조원대 계약 해지를 연달아 통보했다.
또 SK온과 설립한 합작법인 ‘블루오벌SK’도 독자 운영 체제로 전환했다. 폭스바겐은 독일 드레스덴 공장 폐쇄를 결정하며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전기차 중심의 투자 기조가 수익성과 시장 상황에 맞춰 재조정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국내 생산거점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해졌다. SK온의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2025년 12월 31일 공시를 통해 서산 3공장 투자 종료 시점을 2026년 말로 1년 연장하고 투자 규모를 1조7000억원에서 9363억9000만원으로 축소했다.
이에 따라 양산 시점은 2027년 전후로 늦춰졌으며 SK온은 가동률 방어를 위해 서산 2공장 일부 라인을 전기차용 NCM에서 ESS용 LFP 배터리 생산으로 전환했다.

“ESS로 EV 공백 메우기 어렵다” 경고도
전기차(EV) 수요 둔화를 에너지저장장치(ESS)가 보완할 것이라는 기대에 대해 증권가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한국투자증권은 2025년 12월 29일 보고서에서 국내 배터리 셀 업체들이 2026년에도 실적 부진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최문선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ESS가 EV 부진을 상쇄할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가 현실화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주가의 추가 조정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에 따르면 2026년 ESS 신규 발전 용량 증가율은 인허가와 프로젝트 진행 속도 등의 제약으로 약 20%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당초 시장이 기대했던 고성장 시나리오와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FSD) 경쟁력 강화가 전기차 수요를 특정 브랜드로 집중시키면서 비(非)테슬라 완성차 업체들의 배터리 수요 확산이 제한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성공 방정식의 역습…‘고정비 늪’으로 돌변한 JV
전기차 고성장기 K배터리의 ‘필승 전략’이었던 합작법인(JV)은 이제 거대한 재무 리스크로 변했다. JV는 특정 고객 물량에 맞춰 설계된 만큼 수요 변화에 따른 생산 전환이 쉽지 않다. 가동률이 하락할 경우 고정비 부담은 배터리 업체의 실적과 재무 구조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한다.
신영증권은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미국 시장 매출 비중이 평균 40%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미국 전기차 판매 둔화의 영향이 다른 지역보다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같은 상황에서 LG에너지솔루션은 혼다와의 합작공장(L-H 배터리) 건물을 약 4조2000억원에 매각하기로 공시했다. 회사 측은 유동성 확보 차원의 결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시장에서는 JV 구조 조정의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유럽 시장도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전기차 판매 자체는 2025~2026년 완만한 성장이 예상되지만 경쟁 구도는 한국 업체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유럽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업체 점유율은 49.7%로 한국(45.1%)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저가형 LFP 배터리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의 공세가 본격화된 결과다. CATL은 2026년 초 헝가리에서 연 100GWh 규모 공장 가동을 예고했다.
소재 부문에서는 광물 가격 하락에 따른 ‘역래깅 효과’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리튬 가격 급락으로 판매 가격은 빠르게 낮아졌지만 과거 고가에 매입한 원재료를 사용한 제품 비중이 여전히 높아 수익성 회복은 지연되고 있다. 이 같은 역마진 구조가 해소되지 않는 한 수주 물량 확대가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신용평가는 최근 보고서에서 2026년 배터리산업 전망을 ‘비우호적’으로 평가했다. 한신평은 “미국 시장 수요 역성장 가능성과 신규 공장 고정비 부담으로 셀 업체의 실적 부진이 지속될 수 있다”며 “중국 업체들의 해외 생산능력 확대를 감안하면 미국 외 시장에서도 점유율 방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업계에서는 보조금과 정책 환경에 의존한 성장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중심의 전략은 정책 변화에 취약하다는 한계를 드러냈다”며 “원가 경쟁력 강화와 사업 구조 다변화 없이는 중장기 회복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