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 직후 비트코인 가격이 크게 치솟으며 가상자산 업계의 주류 금융 시장 편입이 가속화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비트코인을 미국의 전략자산으로 비축할 것이라는 공약과 더불어 미국을 가상자산의 수도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비트코인과 함께 그가 주목했던 가상자산이 바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 등 안전자산과 교환 비율이 고정된 디지털화폐를 의미한다. 이 중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와 교환 비율이 1대1로 고정돼 있다. 최근 중국을 필두로 한 브릭스(BRICs)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준비하고 주요 산유국들이 석유 거래에 달러 외 통화를 결제통화로 채택하는 등 달러의 글로벌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달러의 지배력을 다시 강화하는 데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달러 패권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달러 리사이클링’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큰 기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러 리사이클링이란 미국이 무역수지에서 막대한 적자를 내서 해외로 유출된 달러가 대미 흑자국들의 미국 유가증권 매입을 통해 다시 미국으로 환입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변동성 커진 미국 채권 금리
달러 리사이클링이 미국 달러의 유통 체계만을 안정시킨 것은 아니다. 대미 무역흑자국들이 미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미국의 재정적자를 떠받치고, 이러한 채권 수요는 금리 또는 이자 부담의 안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트럼프 1기 시절 부각된 미·중 무역분쟁을 시작으로 중국의 미국채 매수가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미국채 보유액은 2014년 최대 1조3000억 달러를 상회했으나, 현재는 8000억 달러를 하회하고 있다. 이에 더해 코로나19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한 대규모 재정지출이 이어지며 쏟아지는 미국채를 시장에서 감당하기 버거워진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가 최근 크게 확대된 미국 채권 금리의 변동성이다. 채권 금리는 단순히 돈을 빌리는 비용 이상을 함의한다. 특히 장기 금리는 기대인플레이션과 잠재성장률의 함수로 알려져 있어, 시장참여자들이 경기를 판단하는 가늠자로도 여겨진다. 한편 금리를 경기 판단 지표로 삼기 위해 필요한 대전제가 있는데 바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다. 흔들리는 땅 위에서는 영점을 맞출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국이라는 ‘큰손’이 사라진 상황에서 비대해진 국채 발행량은 금리 변동성의 확대로 이어졌고, 이런 금리의 상황은 경기 판단이 아닌 미국 정부의 재정건전성, 더 나아가 달러 시스템의 약화를 보여주는 상징이 돼 버렸다. 이런 가운데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채 수급 안정 및 트럼프가 그리는 달러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와 1대1 교환 비율로 발행되는 코인이다. 대표적으로 테더의 USDT, 서클의 USDC, 그리고 최근 페이팔에서 발행한 PYUSD가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전체 시장 규모는 약 2150억 달러이며, 이 중 테더와 서클이 발행한 USDT와 USDC가 약 90%를 차지한다.
달러 지배력 강화 포석
초기에는 준비 자산의 투명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제3자의 검증을 통해 주요 준비 자산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 대부분의 준비금은 미국 국채에 투자되며, 특히 서클은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이후 은행 예치금을 대폭 줄이고 준비 자산의 약 90%를 국채로 전환했다.
테더 및 서클 양사가 보유한 미국채는 현재 기준으로 12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단순 비교로 한국이 보유한 1167억 달러(2024년 6월 기준)보다도 많다. 최근에는 테더가 미국채 투자를 통해 5% 이상의 고금리로 수익을 창출해 현대판 ‘대동강 물 장사’라 불릴 만큼 화제가 된 바 있다. 물론 현재 2000억 달러 수준의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채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 불균형을 완화 또는 문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기에는 충분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재무부 역시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미국 국채의 소비가 기존 미국 국채의 소비 구조를 바꿨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달러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달러가 아닌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미래의 기축통화로 삼겠다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글로벌 경제 곳곳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자국 통화가 불안정한 국가에서는 임금 지불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고 있으며, 블록체인 기반의 웹3 기업들은 투자금, 비용, 인건비 결제에 주로 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재택근무 확산과 맞물려, 국가 간 금융 시스템의 복잡성을 우회하고 낮은 수수료로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이 부각되고 있다.한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무역 결제에도 활용되며, 전체 무역 대금의 약 10%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결제된다는 추정도 있다. 이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와 같은 전통적인 결제 시스템보다 즉시 결제가 가능하고, 외환 신고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는 장점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확산은 각국의 통화 주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활용도 높아진 스테이블코인
스테이블코인의 등장은 달러 중심 금융 시스템의 새로운 국면을 열고 있다. 이미 다양한 국가와 산업에서 스테이블코인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러한 잠재력에 주목한 트럼프는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World Liberty Financial)’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기축통화로 확립하려는 비전을 내세웠다.월드 리버티 파이낸셜은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계획이며, 가상자산 기반으로 미국 국채에 투자할 수 있는 온도(Ondo)와 대출 플랫폼 AAVE 등과 협력해 적극적인 스테이블코인 금융 비전 실현에 나서고 있다. 이는 단순히 암호화폐 시장에서의 확장을 넘어, 글로벌 금융 시장의 중심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발행량은 불과 4년 전 280억 달러 대비 8배 가까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앞으로도 그 성장세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의 과감한 스테이블코인 전략은 단순히 가상자산 친화적인 접근을 넘어, 달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도구로 활용하려는 비전을 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중요한 변화를 예고하며,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금융 혁신을 넘어 새로운 경제 질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