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중점적으로 보고 있는 시장입니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 소재 지리홀딩스 본사에서 최근 만난 애시 서트클리프 지리홀딩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총괄 책임은 향후 자사의 해외 진출 전략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지리홀딩스는 지리차, 볼보, 지커, 링크앤코 등을 보유한 중국 2위 자동차그룹이다. 올 들어 중국 전기차 시장에선 가격 할인 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왕루이핑 지리차 수석부사장은 이에 대해 “기술 중심의 운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비야디(BYD) 등 타사의 가격 정책에는 특별한 입장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런 설명에도 지리차는 현재 중국 전역에서 공격적인 가격 할인 정책을 펴고 있다. 갤럭시 시리즈의 7개 모델 가격을 공식적으로 약 20% 할인하고 매입 후 판매를 통해 추가 할인을 제공하고 있다. 안후이성 허페이 등지에선 1만~2만 위안(약 380만원) 즉시 할인과 계약금 제로(0), 무이자 할부 등의 프로모션도 진행 중이다. 내수 부양을 위해 연이어 돈을 풀고 있지만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압박에 속수무책인 중국 시장의 단면이다.
AI·로봇에 주력하다 스텝 꼬인 中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올 5월 중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0.1% 내려갔다. 중국의 CPI는 당국의 내수 촉진 정책 발표가 맞물리면서 올 1월 전년 동월 대비 0.5%로 뛰었지만 2월부터 줄곧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도매 물가로 불리는 생산자물가지수(PPI)는 더 하다. PPI는 일정 시차를 두고 최종 소비재 가격에 영향을 미쳐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로 쓰인다. 올 5월 중국의 PPI는 전년 동월보다 3.3% 내렸다. 32개월 연속 하락세다. 4월(-2.7%)보다 하락폭이 0.6%포인트 커진 데다 로이터통신 등 시장의 전망치(-3.2%)보다도 하락폭이 컸다. 22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의 하락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가 기준금리를 내리고 대규모 채권 발행, 소비재 이구환신(낡은 제품을 새것으로 교체 지원) 프로그램 등 각종 소비 진작책을 펼치고 있지만 미·중 무역 긴장과 계속된 부동산 경기 둔화 탓에 물가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 올 상반기 중국 최대 쇼핑 축제인 618(6월 18일)을 전후해 대부분 유통 업체와 온라인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대대적인 마케팅과 할인행사에 나섰지만 소비자 반응은 시들했다. 618은 하반기 솽스이(雙十一·11월 11일)와 함께 중국의 양대 쇼핑 축제로 꼽힌다. 징둥의 창립 기념 할인 행사에서 시작해 지금은 중국 온라인 전자상거래 업체가 대거 참여하는 대표 쇼핑 축제가 됐다.중국 베이징 시내에 있는 한 중국 은행에 근무하는 왕모 씨는 “올 들어 지점에서 인력 구조조정이 있었고 지점 실적도 그리 좋지 않아 지갑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며 “징둥이나 타오바오 등에서 다양한 할인 쿠폰을 지급하면서 쇼핑을 장려했지만 꼭 필요한 제품이 아니면 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성비 소비만 제한적으로 이뤄져 고급 외식 업체, 명품 업체, 보석 업체들은 줄줄이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베이징 오리 전문으로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인 전취덕은 올 1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이 7% 감소했고 중국 최대 보석 소매 업체 초우타이푹은 판매 부진으로 최근 1년 새 중국 본토 직영점 900곳을 닫았다. 세계 최대 커피 체인 스타벅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중국 시장에서 이례적인 가격 인하에 나섰다.
베이징 차오양구 대형 쇼핑몰인 카이더몰에 한 중고 매장 사장은 “지난 5월 이후 이런저런 제품 가격을 문의하는 소비자들이 이전에 비해 20~3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돈 풀고 금리 내려도 효과 ‘미미’
중국 업체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가격 할인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격 할인을 통해 움츠러든 소비심리를 되살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업체들의 제 살 깎아 먹기식 가격 할인은 수익성 악화만 야기할 뿐 오히려 소비자들의 관망 심리만 부추기는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청년 실업률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매년 1000만 명이 넘는 대학 졸업생들이 취업 시장에 신규 진입하고 있는데 수출 전망이 불확실한 데다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맞물려 중국 기업들이 채용을 빠르게 줄이고 있다. 중국의 16~24세 청년실업률은 올 4월 기준 15.8%다. 중국 전체 실업률(5.1%)의 세 배를 웃돈다.중국 정부는 청년실업률이 2023년 6월 사상 최고치인 20%를 넘어서자 관련 통계 발표를 중단했다. 그러더니 같은 해 12월부터 학생을 통계에서 뺀 새로운 청년실업률을 발표했다. 여기에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는 구직자로 분류돼 중국 내 청년 실업 현실을 통계가 축소 반영한다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올여름엔 역대 최대인 1222만 명의 대학 졸업생이 취업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어 올 하반기 이후 청년실업률이 더 치솟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중국 내 복합 악재를 두고 고속에서 중속으로 성장 발전 단계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격화된 미국과 패권 다툼 속에서 전기차·배터리·AI·로봇 등에만 과도한 지원과 투자를 남발한 부작용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첨단기술 산업에만 집중하느라 사회안전망 확충, 소득 증가, 금융시스템 개편 등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이유에서다. 첨단기술 분야가 상대적으로 고용 창출 효과가 크지 않은 이유도 있다.
소득 확대 정책부터 필요
미국과 무역전쟁이 완화된 이후에도 중국의 디플레이션 압력은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많다. 무역전쟁 유예가 장기간 부동산 침체로 수요 감소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 내 경제 회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디플레이션 압박이 기업 이익과 근로자 소득을 잠식하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결국 물가는 더 떨어지게 될 것이란 경고다.올 들어 중국 정부가 내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미국과 관세전쟁이 잦아들고 내수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으면 다시 밀어내기식 수출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 이미 중국발 저가 제품으로 철강, 전기차, 배터리, 석유화학 등 주요 산업에서 시장 질서가 흐트러졌는데 헐값 공세까지 더해지면 교역국들의 경제 회복까지 발목 잡힐 우려가 크다.
김재덕 산업연구원 베이징지원장은 “중국 소비자들의 직접적인 소득 증대를 위한 정부 정책이 부족한 게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며 “대규모 사회보장 확대, 첨단기술 산업 이외의 공공투자 확대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전반적인 임금 상승을 유도해 확실한 소득 확대 정책을 통해 구매력을 확대해야 내수를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