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2005
1막 : 생존의 시간, 재벌 해체와 재편의 서막
1990년대 중반 재계는 ‘무한 팽창의 시대’를 보냈다. 삼성·현대·대우·LG 등 대기업들은 금융·건설·전자·자동차를 넘나들며 끝없는 다각화 경쟁을 벌였다. ‘문어발 경영’이라는 비판에도 차입을 통해 계열사를 늘려갔다.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Segyehwa)’를 내걸고 자본시장 개방과 금융자율화를 추진했지만 차입 경영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당시 대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400%를 웃돌았고 일부는 500%에 육박했다.1997년 한보철강 부도와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를 뒤흔들었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기아, 진로, 대농, 쌍방울 등 대기업이 연쇄 도산했고 외환보유액은 39억 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1997년 11월 21일 한국은 IMF에 580억 달러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재벌 구조는 IMF 관리체제 아래 대대적인 해체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다. 김대중 정부는 “구조개혁 없이는 생존도 없다”는 원칙 아래 ‘빅딜 정책’을 추진했다. LG반도체와 현대전자의 합병(현 SK하이닉스, 1999년), 르노의 삼성자동차 인수(2000년) 등이 대표적이다. 동시에 기업지배구조 투명화, 회계기준 국제화, 외국인 투자 개방이 급속히 진행됐다.
국민들도 위기 극복에 동참했다. 1998년 1월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에는 350만 명 이상이 참여해 227톤, 약 2조원 규모의 금이 모였다. 그러나 고통도 컸다. 1998년 2월 실업률은 8.8%, 청년실업률은 14.5%로 치솟았고 17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IMF 세대’라는 단어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체질 개선에 나섰다. 삼성은 1998년 65개 계열사를 45개로 줄이고 삼성자동차와 삼성항공을 정리하며 반도체·디지털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 취임(1998년) 이후 에너지·통신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압축했고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2004년 소버린 사태를 계기로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LG는 2003년 LS, 2004년 GS를 분리하며 지주회사 체제를 확립했고 현대그룹은 2001년 이후 자동차·조선·건설 부문이 각각 분화했다.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성장의 씨앗이 움텄다. 1998년 이후 벤처 붐이 일며 NHN(현 네이버), 다음(현 카카오), 한글과컴퓨터 등이 등장했다. 삼성전자의 ‘애니콜’은 국산 전자산업의 자존심이 됐고 현대차는 1998년 EF쏘나타로 미국 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외환위기의 혹한은 한국 경제를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재무 건전성 강화의 출발점이 됐다. 순환출자 해소, 내부거래 제한, 변칙 상속 차단이 제도화되면서 한국 재벌 구조는 ‘생존형 조직’에서 ‘책임형 기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개혁은 이후 30년 한국 대기업 체제의 뼈대를 만든 대전환의 서막이었다.

2006~2015
2막 : 스마트 혁명과 중국 특수의 10년
2000년대 중반 ‘생존의 시대’를 넘어 세계 시장으로 내달린 ‘질주의 10년’이 왔다. 기업들이 기술력과 브랜드 파워를 앞세워 글로벌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한 시기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전환점이었다.개방된 중국 시장은 한국 제조업의 ‘황금시장’이 됐고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전자·포스코·SK이노베이션 등은 잇따라 중국에 공장과 합작법인을 세웠다. 전자·자동차·석유화학·철강 중심의 중국 진출이 본격화됐다.
2005년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으며 한국 수출의 21.77%를 차지했다. OECD 등 주요 기관은 2006년 “한국 등 동아시아 제조국은 중국 특수의 수혜자이자 향후 최대 경쟁자”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IT 혁신이 산업의 축을 바꾸면서 스마트폰·LCD·자동차가 수출증가를 이끌었다. 삼성전자는 2010년 6월 첫 스마트폰 ‘갤럭시S’를 출시해 7개월 만에 누적판매 1000만 대를 돌파하며 애플과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했다. 반도체와 OLED에서도 세계 1위를 굳혔다.LG전자는 OLED TV를 상용화하며 디스플레이 기술 강국의 상징이 됐고 SK그룹은 2012년 하이닉스 인수를 통해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현대차그룹은 2008년 ‘제네시스’를 선보이고 중국·체코·미국에 생산기지를 확충해 2014년 글로벌 판매 755만 대로 세계 5위 완성차 업체로 도약했다. 포스코는 중국·인도네시아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며 해외 생산 기반을 확대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외환위기 이후 찾아온 두 번째 시험대였다. 그러나 IMF 위기 이후 구축한 재무 건전성과 구조조정 경험이 위기 대응력을 높였다는 평가다. 외환보유액은 1997년 200억 달러 수준에서 2008년 2600억 달러를 넘어섰다. 기업 부채비율도 1998년 평균 400%대에서 2010년대 초 100%대 초반으로 안정됐다.2015년을 전후해 중국의 내수 중심 전환과 기술 추격이 본격화하면서 ‘중국특수’는 서서히 힘을 잃었다. 2014년 이후 LCD·스마트폰 등 주요 품목에서 중국 기업의 추격이 본격화됐고 2016년 사드(THAAD) 갈등으로 중국 소비재 시장에서의 불매와 제재가 현실화됐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들에 기술·데이터·플랫폼 중심의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겨줬다.

2016~2020
3막 : 4차 산업혁명과 플랫폼 대전환
2010년대 후반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 산업의 축은 ‘제조’에서 ‘디지털’로 이동했다. 반도체·배터리·플랫폼이 주도한 이 시기는 세계 경기 둔화 속에서도 기업들은 기술 경쟁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반도체가 경제를 지탱하고 배터리와 플랫폼이 그 위에 새로운 성장 서사를 쌓았다.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반도체였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17년 4분기 전 세계 D램 시장점유율은 삼성전자 46%, SK하이닉스 28.7%로 두 회사가 74.7%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같은 해 7월 평택 반도체 캠퍼스를 완공해 단일 공장 기준 세계 최대(289만㎡) 생산라인을 확보했다. 2017년 삼성전자는 반도체 매출 94조원 이상을 올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명실상부 1위 자리를 지켜온 인텔(약 90조원)을 처음 추월했다.SK하이닉스는 청주 M15 공장을 가동하며 낸드플래시와 AI용 반도체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 시기 한국의 반도체 수출 비중은 2016년 12%대에서 2018년 20%를 넘어서며 한국 경제의 사실상 ‘단일 성장엔진’으로 부상했다.


배터리 산업도 세계 시장의 새로운 주역이 됐다.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이노베이션(현 SK온)이 ‘배터리 3강’을 형성, 2018년 이후 전기차 배터리 글로벌 점유율 상위 5위권 내에 이름을 올렸다.
유럽·중국 완성차 업체들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전환하면서 배터리 3사는 유럽(폴란드·헝가리), 미국(조지아·켄터키) 등으로 생산기지를 확대했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2019년 한국 배터리 3사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34%를 넘었다.
네이버·카카오를 중심으로 한 플랫폼 산업의 부상도 눈에 띄었다. 간편결제, 웹툰, 스트리밍, 커머스 등에서 새로운 소비 생태계가 형성됐다. 코로나19가 2020년 확산되며 비대면 산업이 급성장했고 ESG 경영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재계에는 세대교체와 구조 개편의 바람이 불었다. 이재용(삼성)·정의선(현대차)·구광모(LG) 회장 등 3세 총수들이 경영 전면에 나섰고 각 그룹은 미래형 사업구조로 체질을 바꿨다.1995년 이후 30년간 이어진 계열분리는 이런 변화의 토대가 됐다. 1997년 삼성에서 분리된 CJ와 신세계가 각각 K콘텐츠·유통 중심의 독자 기업으로 성장했고 LG에서 갈라져 나온 LS(2003년), GS(2004년)는 전선·에너지 중심의 B2B 그룹으로 재편됐다.
현대그룹은 2000년대 초 자동차, 조선, 건설로 완전히 분화했다. 현대차그룹은 세계 3위 완성차 기업으로, HD현대(옛 현대중공업)는 세계 최대 조선사로 성장했다.
이러한 계열분리는 단순한 ‘가문 분리’가 아닌 산업 재편의 전략적 진화였다. 제조·에너지·유통·콘텐츠로 다극화된 산업 구조는 이후 AI·방산·원전 등 신성장 산업으로 확장의 발판이 됐다.

2021~2025
4막 : 공급망 리셋과 AI 초격차 경쟁 시대
2020년대 초반 세계경제는 본격적인 ‘지정학의 시대’로 진입했다. 팬데믹, 미·중 기술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연달아 터지며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렸다. 반도체·배터리·희소금속 같은 핵심 소재는 산업재를 넘어 국가안보 자산으로 격상됐다.
그리고 2022년 말 챗GPT의 등장은 산업의 무게중심을 ‘공장’에서 ‘연산’으로 옮겨놓았다. 기술과 안보, 에너지가 얽힌 복합위기 속에서 기업들은 AI와 지속가능성을 생존의 핵심 축으로 삼기 시작했다.디지털전환을 거치며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온 기업들은 다시 거대한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지정학 리스크와 AI 패러다임 전환이 맞물린 2020년대의 전장은 과거와 성격이 다르다.
반도체와 AI 인프라, 에너지 안보와 방산·조선·원전 같은 전략 산업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기술 축적과 생산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데이터 연산력, 정교한 알고리즘, 생태계 지배력이 새로운 우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 변화를 이끄는 것은 3·4세 경영 체제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의 무게중심을 메모리에서 AI 반도체와 차세대 파운드리로 옮겼고 정의선 회장은 전기차·자율주행 기반의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전략을 앞세웠다.
구광모 회장은 AI·바이오·클린테크에,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배터리·에너지 솔루션에 집중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 등 AI 반도체로 ‘초격차’ 전략을 강화했고 LS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은 초대형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시장을 선점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콘텐츠·커머스·광고의 지형을 다시 그리고 있다.
전통 산업도 방향을 바꿨다. 반도체는 미·중 기술전쟁 한가운데서 수출 규제와 보조금 제한에 대응하고, 전기차 시장은 보조금 축소로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구간에 진입했다. 반면 방산·조선·전력기기·원전은 새 성장축으로 부상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5년 9월 기준 한화그룹의 시가총액은 연초 대비 163.7%, 두산그룹은 138.8%, HD현대는 66.3% 늘었다. 지정학 리스크가 새로운 수요를 만든 셈이다.

AI의 등장은 산업의 판 자체를 바꿨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네이버와 카카오는 초거대 AI 서비스에 수조원을 투입하고 있다. 공장이 경쟁력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데이터센터의 연산 능력과 정교한 알고리즘이 기업가치를 결정한다.외환위기의 해체와 재편, 중국 특수의 질주, 디지털전환의 가속을 거치며 한국 대기업은 위기를 성장의 동력으로 바꿔왔다. 산업의 중심은 제조에서 기술, 에너지, 데이터로 옮겨가고 있다. 반도체·배터리·AI가 새로운 3대 축이 됐고 방산·원전·전력기기가 그 뒤를 잇는다.
지난 30년은 ‘생존에서 혁신으로’, 그리고 ‘혁신에서 초격차로’ 이어진 여정이었다. 다음 30년의 경쟁력은 공장이 아닌 연산, 제품이 아닌 기술, 자본이 아닌 지속가능성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한국 대기업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권력의 온도 따라 움직인 ‘재계 30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진 건 법과 제도만이 아니었다. 재계는 그때마다 권력의 온도를 읽으며 몸의 방향을 재빨리 틀었다.
개혁 기조가 강할 땐 계열 분리와 지배구조 개편으로 몸집을 줄였고 규제완화기에는 M&A와 해외 투자로 외연 확장에 나섰다. 구조조정, 신사업 진출, 생산기지 다변화 등 전략은 정권의 경제 철학에 따라 바뀌었다.
김대중 정부(1998~2002년)는 IMF 위기 직후 ‘구조조정 없는 생존은 없다’는 기조 아래 재벌개혁에 착수했다. 정부 주도의 빅딜 정책으로 LG반도체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가 합병됐고 삼성자동차는 르노에 인수됐다. 비주력 사업 정리와 계열분리의 신호탄이었다.
노무현 정부(2003~2007년)는 ‘경제민주화’ 기치 아래 순환출자 규제와 소액주주 권리 강화를 추진했다. LG그룹, GS그룹, LS그룹 등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가족 경영의 틀을 재정비했다.
이명박 정부(2008~2012년)는 기업 친화와 규제완화 기조 아래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M&A와 신사업 확장이 재개됐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그룹·포스코 등은 해외 생산기지 다변화에 속도를 냈고 녹색성장 전략을 바탕으로 에너지·플랜트·인프라 사업이 성장 축으로 부상했다.
박근혜 정부(2013~2016년)는 ‘창조경제’를 내세웠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이 지배구조 문제를 부각시켰다. 사익 편취와 승계 이슈가 재벌 책임론으로 번졌다.
문재인 정부(2017~2022년)는 ‘공정경제’를 내세워 내부거래와 불공정 지배구조를 집중 단속했다. 재계는 ESG 경영으로 대응했지만 지배구조 개선 압박은 거셌다.
윤석열 정부(2022~2025년)는 규제완화와 민간 주도 성장을 강화했다. 반도체·AI·배터리를 산업 전략의 중심에 두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투자에,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은 전기차 생태계 확장에 속도를 냈다.
현 이재명 정부는 ‘공정성·분권형 경제’를 내세워 내부거래 규제와 지역균형 투자, 중소기업 상생에 방점을 찍고 있다.
재계는 지난 30년 동안 정권 변화에 따라 몸을 낮추거나 키우는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조정해왔다. 최근 변화의 축은 ‘권력 대응’에서 ‘기술 주도’로 이동하는 추세다. 과거에는 정권의 기조에 따라 구조조정이나 계열분리, 투자 보류를 결정했지만 지금은 기업 스스로 성장의 방향을 설계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핵심인 HBM 분야에 수백조원을 투입하며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 확보에 나섰다. 현대차그룹과 LG그룹은 전기차와 배터리 생태계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과거 권력의 풍향계를 살피던 재계는 이제 산업 지도를 스스로 그리는 주체로 이동했다. 투자 방향의 무게추가 정치가 아니라 기술과 시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