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17일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80원을 넘겼다. 환율이 1480원을 상회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으로 시장 불안이 컸던 지난 4월 이후 8개월 만이다. 공항이나 은행에서 환전하려는 소비자는 1530원대 환율을 체감해야 했다.
수치가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시장과 여론에서도 고환율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다. 지난 11월 외환당국이 최근 환율 급등(원화 약세)의 원인으로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 확대를 언급했고 비슷한 분석을 담은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한국은행 책임론과 유동성 확대 정책이 문제라는 반박이 이어졌다. 이에 이창용 한은 총재가 직접 입장을 정리하며 나서기도 했다.
현장에서는 이미 체감이 달랐다. “위기는 위기지만 공포는 아니다”라는 전문가들의 설명과 달리 기업도 개인도 이미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현장의 곡소리에 정부는 국민연금과 기업까지 동원했지만 시장에 뚜렷한 변화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환율을 둘러싼 3가지 쟁점을 정리했다.
①말 바꾼 한국은행
이창용 한은 총재가 최근 환율 상승 원인을 둘러싼 입장을 40일 만에 선회했다. 이 총재는 11월 12일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최근 환율 움직임의 상당 부분이 국내 거주자의 해외 투자 확대에 따른 것이라 분석하며 과도한 변동성이 발생하면 외환시장 개입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같은 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서학개미 책임론을 언급했다. 달러를 사서 해외 주식을 사는 개인투자자, 일명 서학개미의 공격적인 투자에 환전 수요가 폭발하면서 환율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12월 17일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기자설명회에서는 “환율 상승을 누구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비판 여론이 커지자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수급 요인만 이야기하면 남을 탓한다는 지적이 많아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한·미 경제성장률 차이, 금리 격차,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 장기적 요인이 현재 원화 약세를 설명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장기 요인은 고치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단기적으로는 수급 요인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환율 상승을 전통적 의미의 금융위기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 총재는 “과거 원화 평가절하로 금융기관이 무너지거나 국가부도 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나 2008년 금융위기와는 다르다”며 현재 한국은 외화 자산이 외화 부채보다 많아(순채권국) 원화 가치가 떨어져도 달러 자산을 가진 쪽에서는 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환율 상승이 물가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고 수출·수입, 내수 등 경제 주체 간 격차를 심화시켜 사회적 갈등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이를 두고 “위기라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과거와 성격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②총체적 난국?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이 떠오릅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았다.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하다.’” 한 금융권 전문가는 이렇게 운을 떼며 현재 원화 약세(환율 상승)를 평가했다. 단순히 달러 강세 때문만이 아니라 국내 자산 포트폴리오 변화, 장단기 금리 격차, 국제 변수 등 여러 요인이 얽힌 복합적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고환율의 원인을 두고 공방이 이어졌지만 사실 어느 한 요인만이 아니라 여러 요인이 상승을 부추겼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한국 경제의 자산 포트폴리오 구조다. 개인과 기관투자가 모두 해외자산 비중을 확대했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일반정부’의 해외 주식 투자는 총 245억1400만 달러로 전년 동기(127억8500만 달러)보다 92% 늘었다. 같은 기간 ‘비금융기업 등’의 해외 주식 투자는 95억6100만 달러에서 166억2500만 달러로 74% 증가했다. 통상 일반정부의 해외 주식투자는 국민연금, 비금융기업 등은 개인투자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한은은 설명했다.
굳이 누가 더 많이 해외자산을 매입했는지를 따진다면 국민연금이 서학개미보다 많았다. 올 들어 3분기까지 국민연금의 해외 주식 투자액은 개인투자자의 1.5배로 전년 동기의 1.3배보다 격차가 더 벌어졌다.
다만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한 10월부터 두 달간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 매수세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개인투자자는 지난 10~11월에만 123억3700만 달러에 달하는 해외 주식을 순매수했다. 특히 10월에는 68억1300만 달러를 순매수했는데 이는 2011년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당장 환전하지 않는 것도 원화 약세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에 기업들이 맡긴 달러 예금 잔액은 11월 말 기준 537억4400만 달러로 전달(443억2500만 달러) 대비 약 21% 급증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증가폭이다. 원화 약세 전망과 약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자금 확보 계획 등이 맞물리며 기업들이 달러를 더 많이 쌓아 두는 분위기가 확산된 것으로 풀이된다.
고환율의 원인이 늘어난 통화량이라는 주장도 부쩍 늘었다. 대표 통화량 지표는 광의통화(M2)다. 지난 9월 기준 원화 통화량은 1년 전보다 8.5% 늘어난 반면 같은 시점 미국 달러 통화량은 4.5% 증가에 그쳤다. 단순 비교만 보면 원화 증가폭이 두 배에 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한은이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내리면서 시중에 돈을 풀었고 이로 인해 원화 가치가 약해지고 달러가 상대적으로 비싸졌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한은의 생각은 달랐다. 12월 16일 이 같은 해석에 정면 반박했다. 한은은 “단기 비교로만 판단할 수 없고 코로나19 이후 약 5년간 통화량 흐름을 함께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간 한국의 누적 통화량 증가율은 49.8%로 미국(43.7%)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한은은 통화량 계산법 차이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통화량 통계상 M2에 상장지수펀드(ETF), 채권형 펀드 등이 포함되는데 ETF 등 투자상품이 늘면서 한국 기준 M2는 증가하지만 미국 기준으로는 통화량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IMF 기준대로 ETF를 제외하면 통화량 증가율은 5.5% 정도”라고 말했다. 기준을 통일하면 한국의 증가율도 미국 수준으로 축소된다는 얘기다.
지난 10월 M2 증가액 41조1000억원 중 수익증권은 31조5000억원으로 76.7% 차지했다. 한은은 앞으로 ETF 등 수익증권을 통화량 계산에서 제외할 계획이다. 아울러 소비쿠폰 지급 등 정부의 확장재정 정책이 통화량을 늘리는 효과는 일부 있지만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책임론이 일고 있지만 해외 투자 규모가 늘어난 것도, 시중 유동성이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한국과 미국 간 금리 차, 미국발 정책 변수, 일본 엔화 약세 동조화, 안전자산 선호 등 거시적인 요인이 맞물리며 세계적인 약달러 기조 속 원화 약세가 나타났다.
달러인덱스는 12월 17일 98.37을 기록했다. 달러인덱스는 유로화 등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다. 100 아래로 떨어지면 달러가 상대적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5월 이후 100 아래로 내려간 뒤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③팍팍해진 민심에 정부 대응 카드는
올해 1~1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2.1%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둔화했다. 그러나 10월과 11월 각각 2.4%를 기록하며 최근 2% 중반으로 상승했다. 여행 관련 서비스 가격의 일시적 오름, 기상 여건 악화로 인한 농축수산물 가격 상승, 그리고 고환율로 인한 석유류 가격 인상이 겹친 결과다.
한은은 내년 원·달러 환율이 1470원대를 유지할 경우 물가가 0.2%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내년 전망치 2.1%에서 2.3%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환율은 자영업자, 건설업 등 내수에 부담을 준다. 서민들의 생활이 팍팍해진다는 얘기다. 여론이 악화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대통령실은 12월 18일 국내 대기업 관계자를 불러 환율 대응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국내 수출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을 국내에 환류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같은 달 16일엔 기획재정부가 주요 수출기업들을 불러 대규모 국내 투자를 독려했다. 15일엔 국민연금이 헤지 없는 달러 투자를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국민연금은 한은과 체결한 650억 달러 규모 외환스와프 한도를 내년 말까지 연장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달러 매도를 통한 전략적 환헤지를 실행할 수 있는 근거 조항도 내년까지 유효하게 됐다. 국민연금이 이를 활용하면 갑작스러운 달러 매도·매수로 시장이 출렁이는 일을 막을 수 있어 환율 변동성을 완화하고 원화 가치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한편에선 국민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환율 시장의 ‘소방수’ 역할에 나서는 것이 적절하냐는 비판도 나온다.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는 지적이다. 환율 하락 과정에서 연금 운용 수익이 훼손됐다는 비판이 제기될 경우 국민연금이 부담해야 할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