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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소비·고용 둔화…힘 잃는 낙관론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경기 침체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견고했던 미국 고용·소비 시장에서 둔화 조짐이 목격되고 중국 ‘리오프닝’ 효과가 예상외로 약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하는 등 경제 주체들의 경계감이 커지는 중이다.

 

美 고용.소비 둔화세

금값 랠리 언제까지

지난해 하반기 이후 경기 침체에 관한 여러 논쟁이 들끓었다. 주요 연구기관에서는 얕은 침체(ShallowRecession) 전망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침체에 빠진 뒤 좀처럼 반등을 하지 못하는 ‘늪지대 침체(Swamp Recession)’, 소득 상위층이 불황의 직격타를 맞는 ‘리치세션(Richcession)’, 침체를 피하면서도 경기 악화에 따른 고통이 장기간 지속되는 ‘슬로세션(Slowcession)’ 등 여러 시나리오를 내놨다.

 

이번에는 앞선 논쟁 때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올 초까지는 세계 최대 소비 시장인 미국 경제가 탄탄할 것이라는 관측 덕분에 연착륙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시각이 다수였다.

 

최근에는 경기를 바라보는 기류가 심상찮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촉발된 은행 위기가 중소 은행을 중심으로 번지면서 미국 경제가 사실상 침체 국면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SVB와 시그니처은행, 퍼스트리퍼블릭은행 등이 초우량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미 국채를 대거 사들였음에도 대규모 평가손실을 입자 ‘채권 시장도 믿기 힘들다’는 불안감이 퍼졌다.

 

몇 가지 대목에서 예사롭지 않은 지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선, 미국의 고용 지표다. 지난 4월 6일 발표된 미국의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22만8000건으로 예상치인 20만건을 웃돌았다. 지난 4월 4일 발표된 미국의 2월 구인 건수는 990만건으로 2021년 5월 이후 처음으로 1000만건을 밑돌았다. 고용 지표뿐 아니라 생산자물가지수, 소매판매 등 다양한 지표에서도 둔화 양상이 포착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의 3월 서비스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1.2로 집계됐다. 전월보다 3.9포인트 하락했다. 소비도 위축세다. 미국 상무부는 2월 소매판매가 전월보다 0.4% 감소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코스트코의 3월 매출 증가율은 약 0.9%로 2020년 4월 이후 최소폭이었다.

 

강력한 리쇼어링(제조 시설 본국 회귀) 정책으로 미국 고용, 소비 시장은 탄탄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부진한 지표가 속속 발표되자 낙관적인 기대감이 흔들리면서 경기 침체가 가시화했다는 우려가 확산한 것이다.

 

연일 급등세를 보이는 금 가격도 심상치 않다. 지난 4월 12일(현지 시간)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올해 6월물 금 선물 가격은 장중 한때 온스당 2044달러 가까이 올랐다가 2024.9달러에 마감했다. 역대 최고치인 2020년 8월 2069.4달러에 바짝 다가섰다.

 

여러 안전자산 가운데 금 가격은 불확실성이 수반된 경기 침체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여왔다. 지난 10여년간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된 금 가격 패턴을 보면 2008년, 2011~2012년, 2020년, 2022년 등의 연도별 구간에서 정점을 찍었다. 당시 금 가격의 선행 요인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투자 심리의 불확실성이 커졌던 때와 일치한다.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 2011~2012년은 미중 무역 분쟁, 2020년은 코로나 팬데믹, 2022년은 고강도 긴축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 등이 투자 심리의 불확실성을 잔뜩 고조시켰던 때다.

 

이에 비춰, 최근 금값 랠리는 미국 주요 투자자들이 경기 침체에 베팅한 결과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로이터통신은 “금값 2050달러 선이 중요한 저항선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돌파할 경우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향해 빠르게 치솟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소비, 고용 지표 둔화가 속속 확인되면서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한 트레이더가 시장 상황을 관찰하는 가운데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통화 정책에 관해 설명하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고 있다. (로이터)
미국의 소비, 고용 지표 둔화가 속속 확인되면서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한 트레이더가 시장 상황을 관찰하는 가운데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통화 정책에 관해 설명하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고 있다. (로이터)

장단기 금리 역전폭 최대

'노랜딩' 가설 무력화

경기 침체의 대표적인 전조 현상인 장단기 금리 추이도 예사롭지 않다. 최근 장단기 금리폭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통상 단기 국채 금리는 기준금리에 영향을 받고 장기 국채 금리는 장기 성장률 전망을 반영한다. 금리 전문가인 캠벨 하비 듀크대 교수 분석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7번의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벌어졌고 그 후 5~23개월 뒤에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마켓워치 등에 따르면, 지난 4월 6일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는 연 3.292%로, 지난해 9월 이후 7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단기채인 3개월 만기 국채 금리는 연 4.945%까지 올랐다. 10년 만기와 3개월 만기 간 격차(스프레드)는 1.653%포인트로 커졌다. 이는 미국 중앙은행(Fed) 데이터베이스(FRED)가 관련 통계를 보유하고 있는 1982년 이후 최대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에도 이 수치는 0.6%포인트(2007년 2월) 수준이었다.

 

장단기 금리 역전은 시장 참여자들이 경기의 단기 방향성을 불확실하게 본다는 의미다. 경기 전망이 불투명하면 투자자들은 단기채 투자를 꺼려(수요 감소) 단기채 금리는 상승한다(채권 가격 하락). 반면, 상대적으로 장기채 투자는 수요가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장기 채권 금리는 하락하고(채권 가격 상승) 장단기 금리 차이가 축소되거나 아예 역전된다. 과거 사례를 돌아보면 장단기 금리 역전은 경기 하강의 전조로 높은 상관관계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도 장단기 금리가 역전된 적이 있었지만 당시는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단기 금리 상승효과가 더 컸으나 이제는 장기 금리마저 뚝뚝 떨어지는 중이다. 통상 금리 인상-경기 침체 국면에서 채권 수익률 곡선(일드커브)은 한동안 ‘플래트닝(flattening·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보다 더 상승)’이 지속되다 경기 침체 우려가 확산할 때 단기 금리 인하 가능성이 부각되며 ‘스티프닝(steeping·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보다 더 하락)’이 나타난다. 주식 시장은 이후 본격적으로 침체 시나리오를 반영한다. 미국의 IB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1800년대 말 이후 미국에서 발생한 침체 30개를 분석한 결과, 침체 신호 3가지로 ▲국채 수익률 곡선의 스티프닝 ▲대출 조건 강화 ▲연준의 비자발적 금리 인하를 꼽았는데, 이미 앞의 두 가지 신호가 켜졌다고 진단했다.

 

실제 금융 시장에서는 미국 경제가 침체 없이 인플레이션을 잡을 것이라는 ‘노랜딩(No Landing)’ 가설이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시각이 확산 중이다. ‘노랜딩’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2월 보도하면서 금융권에 퍼진 용어다.

 

미 연준이 금리를 빠른 속도로 올렸음에도 물가, 고용 등 미국 경제는 침체 근처에도 가지 않자 연착륙 기대감이 확산했다.

 

금리 '피크 앤 하이' 패턴

연준 '피벗' 시일 걸릴 듯

사정이 이렇자 증시를 바라보는 투자자 시선도 혼란스럽다. 낙관론을 펴는 쪽에서는 SVB 사태로 고용과 투자 활동이 둔화되면 인플레이션 하락세가 가팔라지고 이에 연준이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올 1분기 증시는 이런 기대감을 빠르게 선반영해왔다. 지난 4월 12일(현지 시간) 발표된 3월 CPI 상승률도 둔화세가 확인됐지만 FOMC 의사록에서 연준 경제팀이 올해 완만한 침체를 전망했다는 소식에 투자 심리가 악화했다. 전문가들은 시장에서 ‘경기 침체 우려=금리 인하’라는 도식에 빠져 섣부른 낙관론을 키워온 게 글로벌 증시에 자칫 독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는다.

 

무엇보다 연준의 정책 기조 전환이 시장 예상과 달리 매우 느린 속도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강도 높은 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오던 연준이 정책 기조를 갑자기 바꾼다면 오히려 시장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피크 앤 하이’ 패턴이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장기적으로는 고용과 투자 측면에서 위험 요인이 부각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금리 인상과 이에 따른 SVB 사태 여파로 대형 은행과 중소 형 은행 간 유동성 공급이 양극화 양상을 보일 수 있어서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형 은행으로 예금이 몰리고 중소형 은행의 자산 규모가 축소되면 대출 여력에 제한이 따른다. 이는 시차를 두고 실물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 고용 악화, 투자 축소 등의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 5월 금리 인상 페드워치 전망치

우리 경제에서도 고금리에 따른 실물 경제 영향이 본격화한 양상이 짙다. 기준금리가 인상되더라도 시차(lagging)가 존재하므로 실물 시장에 반영되기까지는 시일이 소요된다. 전문가들은 과거 위기 사례에 비춰 고금리에 따른 스트레스 기간이 본격 도래하는 데 대략 1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봤는데, 2023년 하반기부터 실물 경제 영향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제조 기업 302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해 최근 발표한 ‘고금리 지속에 따른 기업 영향’ 조사에 따르면, 기업 10곳 중 6곳 이상은 수익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고 10곳 중 7곳은 비상 경영에 착수했다. 응답 기업의 31%는 이익과 비용이 비슷한 손익분기 상황에 놓여 있다고 답했다. 적자로 전환된 상황이라는 기업도 24.3%에 달했다. 적자가 심화하고 있다는 기업도 11%로 나타났다. 꾸준히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고 응답한 기업은 33.7%에 그쳤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증시에서도 올 하반기에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예측이 나온다. 특히 한국 경제가 미국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침체에 접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지난 2월 한국은행은 경기 침체 우려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7%에서 1.6%로 하향 조정했다. 지난해 5월, 8월, 11월에 이어 네 번째 하향 조정이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 1.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8%, 신용평가회사 피치 1.9% 등 해외 주요 기관이 전망한 수치보다 낮다.

 

김지산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주요국들은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조금씩 상향하는 추세지만 한국은 계속해서 하향 중”이라며 “경기 침체 우려가 미국보다 크기 때문에 연말로 갈수록 더 이상 긴축보다는 유동성을 풀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현 다올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연준이 통화 정책 방향을 선회하는 시기는 경기 둔화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욱 심화될 내년 상반기가 될 것”이라며 “올해는 기준금리를 5.5%까지 완만하게 올리면서 시장의 혼란을 방지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출처 :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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