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도주는 시대를 상징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 그만큼 그곳에 다다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혁신으로 무장하고 실적이 뒷받침해도 1위에 오르는 건 더 힘들다. 2000년 이후 매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미국 시가총액 1위에 이름을 올렸던 기업은 단 4곳뿐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 마이크로소프트(MS), 엑손모빌, 애플이다. 올해는 엔비디아가 추가될 가능성이 유력하다.
인터넷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구글 모회사 알파벳조차 잠시 시총 1위에 오른 적은 있지만 연말 시총 1위를 지키지는 못했다. 잠시 올랐다가 내려오는 기업은 많지만 연말까지 지켜낸 1위는 그 시대 산업 패권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말해준다.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2020년 상위 20위 안에도 들지 못했던 엔비디아는 지난해 처음으로 시가총액 1위 자리를 터치했다. 올해는 9월 말까지 시총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제조업의 시대에는 GE가, PC 시대에는 MS가, 석유 패권의 시대에는 엑손모빌이, 스마트폰 시대에는 애플이 한 시대를 상징하는 기업이었다. 미국 주도주의 흥망성쇠는 곧 현대 인류의 역사다. 반도체 ‘틈새시장’을 공략하던 엔비디아가 시총 1위 자리를 차지한 것은 ‘AI 시대’를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불황 속 ‘철옹성’
1990년대 초반 미국은 성장주보다 경기 방어주가 시장을 지배했다. 1991년 미국은 무려 9차례 기준금리를 내렸다. 그중 2번은 50bp를 인하하는 ‘빅스텝’을 밟았다.
금리인하는 불황기에 쓰는 정책이다. 1991년 미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물가는 4.2% 치솟았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유가는 급등했고 미국 내에서는 저축대부조합(S&L) 파산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신음했다.경기가 하락하는 국면에서 투자자들은 안정적이면서 장기 성장 가능성이 높은 업종을 찾았다. IT 산업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제약, 에너지, 소비재가 증시를 주도했다.
이 시기 에너지·석유 기업들이 가장 큰 힘을 가졌다. 산업, 생산, 교통, 군수 등 모든 분야가 석유 가격에 좌우됐다. 투자자들은 가장 확실한 ‘힘’을 가진 에너지 기업에 자금을 몰아넣었다. 1990년대 초 미국 시가총액 1위를 엑손모빌이 굳건히 지킬 수 있던 이유다.
또 다른 주도주는 제약 기업이었다. 미국 베이비붐 세대가 나이 들면서 고혈압·고지혈증 등 만성질환 치료제 수요가 급증했다. 세계 최초의 제약회사 머크의 주가는 1989년(31.4%), 1990년(21.9%), 1991년(36.6%)까지 3년 연속 급등하며 주도주 자리를 공고히 했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 역시 시가총액 4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998년-윈도가 바꾼 세상
IBM은 1980년대 오늘날 PC의 모태가 되는 IBM 호환 PC를 개발하며 IT 기업으로는 세계 최초로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IBM의 혁신으로 기업활동이 전산화되면서 IT 산업의 토대가 다져졌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주춤하는 듯했다. 컴퓨터를 기업용으로만 국한한 것이 패착이었다. IBM은 개인용 PC 시장에서 라이선스 정책 문제와 가격 경쟁력 부족으로 점유율을 잃었다. 개인용 PC 시대의 주도권은 다른 기업으로 넘어갔다. IBM 호환 PC용 프로세서를 개발하던 인텔과 IBM PC의 운영체제를 개발하던 MS다. 애플은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며 존재감을 굳혔다.
IT 기업의 시가총액 순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96년이다. 직전 해 MS의 역사적인 소프트웨어 ‘윈도95’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IBM이 시가총액 톱5에서 사라지고 MS가 4위로 올라선다. 윈도98까지 잇따라 성공하며 개인의 삶에 컴퓨터가 자리 잡자 MS는 1998년 GE, 인텔, 월마트, 엑손모빌을 제치고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당시 MS 시가총액은 60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승승장구했다. 윈도는 전 세계에 빠르게 보급됐고 MS를 세운 빌 게이츠는 이때부터 세계 제일 부자에 등극한다. 빌 게이츠는 전성기 시절 한 인터뷰에서 “가장 두려운 경쟁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어느 차고에서 무언가를 개발하고 있는 젊은 기업가들이다.” 바로 그 시점 미국의 한적한 차고에서는 구글 창업자들이 자신들이 인터넷 세계의 지배자가 될 줄도 모르고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이후 PC를 넘어 모바일 플랫폼, AI, 클라우드까지 장악하며 승승장구했다.한 시대의 끝, 또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은 2000년초 일어났다. 2월과 3월 MS와 GE를 누르고 1위에 오르는 기업이 등장한다. 닷컴버블의 주역인 시스코시스템즈(이하 시스코)다. 시스코 매출액은 2000년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연평균 50~60%대의 매출 증가율을 기록했다.
시가총액은 매출의 38배까지 뛰었다. 지나친 기대는 2000년 말 버블 붕괴와 함께 큰 조정을 맞게 된다. 2000년 3월 나스닥은 고점을 찍고 그해 5월 말까지 약 37% 떨어졌다. 지수는 이후에도 계속 흘러내려 2002년 10월에는 고점 대비 78%까지 추락했다. 시스코는 연말 시가총액 4위로 내려앉고 이후에는 주도주의 자리에 다시 오르지 못했다.
미국 제조업의 상징인 GE는 1993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주도주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특히 미국의 ‘골디락스’라 불리던 1999년부터 2000년까지 GE는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문어발식 사업 확장과 품질보다 숫자에 집착했던 잘못된 경영 판단으로 전성기가 오래가지 못했고 지난해 3개 회사로 분할되면서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5~2007년은 ‘석유의 시대’였다.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강국의 경제성장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석유의 수요도 크게 늘었다. 특히 중국이 고속성장하면서 2005년 배럴당 80달러 아래였던 유가는 2008년 중순 123달러까지 치솟았다. 수혜는 에너지 패권을 쥔 엑손모빌, 셰브론 등 미국 정유기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기술주가 산업을 주도하면서 주연 자리를 뺏겼고 엑손모빌은 2020년 다우지수에서 92년 만에 퇴출됐다. ‘석유 시대의 종말’을 예고한 이벤트였다.
2009년-애플 제국의 전성기 개막
2009년 미국 시가총액 톱5에는 새로운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2007년 처음 아이폰을 공개하고 2008년 앱스토어로 확장성을 확보한 애플이다.
애플은 2012년 마침내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모바일 시대에 올라탄 기업은 또 있었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 등이었다.
이들의 시가총액은 급증하며 빅테크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렸다. 2015년에는 또 다른 급등주가 있었다. 시장의 세계화를 선언한 넷플릭스였다. 한 해 주가가 130% 넘게 급등하며 주도주 대열에 합류했다.
그 이전인 2013년 CNBC 앵커 짐 크레이머는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 등 빅테크를 ‘FANG’이라고 명명했다.여기에 애플까지 더해진 FANG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주도주를 상징하는 약어가 됐다. 반면 모바일 시대를 준비하지 못한 MS는 2011년 시가총액이 세계 10위까지 곤두박질쳤다.
2017년에는 드디어 톱5가 모두 IT 기업으로 물갈이됐다. 빅테크가 세상을 주도하며 혁신에 속도가 붙었을 때다.
단순히 기술 기업의 성장에 그치지 않고 금융·유통·통신·인프라 등 산업 전반의 구조가 바뀌었다. 애플, MS, 아마존, 구글, 메타(페이스북) 등은 클라우드, 모바일, 인공지능, 광고 플랫폼 등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확보하며 시가총액 상위를 점령했다.
2024년-AI의 시대, 시총 4조 달러 기업의 탄생
2020년에는 반도체 시장에 판도가 바뀌었다. 엔비디아가 한때 ‘반도체 제국’으로 불리던 인텔의 시가총액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CPU의 시대에서 GPU의 시대로의 전환을 준비하던 때였다.
2022년 챗GPT가 등장한 후에는 ‘엔비디아 시대’가 개막했다. AI와 데이터센터에 엔비디아의 GPU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엔비디아 주가가 날아올랐다. 오픈AI가 서막을 연 AI 시대의 주연이 확실해진 것이다.
미국 증시 역사에서 엔비디아처럼 단기간에 시총이 급격히 불어난 기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산업이 AI 전환을 준비하면서 엔비디아의 GPU는 핵심 인프라가 됐다. 엔비디아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증시를 쥐락펴락한다. GPU를 사실상 독점하는 엔비디아는 절대권력이 됐다. PC 시대와 AI 시대를 이끄는 MS, 모바일 시대를 주도한 애플의 성장 속도와 비교해도 엔비디아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애플이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한 후 3조 달러를 달성하는 데 6년이 걸렸고 MS는 5년이 소요됐지만 엔비디아는 2024년 6월 불과 1년 만에 시총 1조 달러 기업에서 3조 달러 기업이 됐다.
시총 2조 달러에서 3조 달러까지 걸린 시간은 단 100일이었다. 올해는 역사상 처음으로 시총 4조 달러의 벽을 뚫었다. 올해 들어 주가는 29% 뛰며 AI 버블론을 무색하게 했다.
2024년의 또 다른 키워드는 MS의 귀환이었다. 1990년대 이후 애플과 구글이 혁신으로 성장하는 사이 MS는 ‘늙은 공룡’으로 밀려났다.
회사에 혁신의 바람이 다시 불어닥친 건 2013년 사티아 나델라 MS CEO가 새로 부임한 이후다. MS는 조직문화 개편과 산업의 흐름을 읽는 M&A, AI, 클라우드 사업 호재 등으로 MS는 2024년 다시 애플을 누르고 시가총액 1위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