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시대’ 글로벌 시가총액 1위로 올라선 엔비디아의 수장 젠슨 황.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가 지난해 세계정부정상회의에 참석해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선택할 전공”으로 ‘생명공학’을 꼽았다.
바이오는 AI를 통해 혁신을 이룰 수 있는 대표 산업으로 꼽힌다. 십수년이 걸리던 신약개발 기간을 6~9년까지 절반 이상 단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약사들은 AI를 ‘시장의 판을 바꿀’ 매력적인 옵션으로 보고 있다. 발달한 첨단 컴퓨팅 기술을 활용해 지금껏 인류의 생명을 앗아갔던 각종 질병의 정복을 앞당길 수 있어서다.
AI를 선도하는 빅테크들의 다음 타깃이 제약바이오이다. 기업 간 거래(B2B)로 AI 사업 영역을 더욱 확대하려는 빅테크 입장에선 연구개발(R&D) 위주의 지식산업인 바이오만 한 고객이 없다. 빅테크들은 제약사들과 적극 협업하는 한편, 바이오 AI 관련 스타트업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실험 자동화 회사 리커전 파머슈티컬스는 ‘젠슨 황 픽’으로도 유명하다.바이오 업계에선 당장은 데이터를 보유한 빅파마들이 이 분야의 ‘칼자루’를 쥐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아무리 좋은 플랫폼도 결국 데이터라는 자원 없이는 결과물을 낼 수 없다.
문제는 이 같은 측면에서 K-바이오가 불리하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이 수십, 수백 년간 신약개발, 임상, 상업화 데이터를 쌓아온 글로벌 제약사만큼의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낡은 데이터 넣으면 신약 쏟아져
바이오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AI 활용 분야는 신약 후보물질 발굴 및 개발이다. 의약품 개발을 위한 비임상이나 임상 등에 따라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간이 미처 취합하지 못하거나 지나쳐버린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한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비아그라가 협심증 치료제의 부작용에 착안해 탄생했듯 기존 물질로도 충분히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며 “AI로 신약을 발굴하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약물의 단점 등을 보완한 개량 신약개발도 쉬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러나 앞으로 AI 기술은 빅데이터 학습을 통해 분자 상호작용을 예측하고 새로운 화합물을 설계하는 단계에 이를 전망이다. 인간의 유전자나 바이러스도 설계 편집할 수 있다. 유전자 편집은 유전질환 등 질병치료에 쓰일 수 있다. 임상 단계에서는 환자 정보를 빠르게 정리하는 것은 물론 가상환경에서 후보물질의 반응을 미리 예측해 임상 시간과 비용을 단축할 수 있다.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는 지난 1월 “향후 AI로 인해 신약개발 시간을 10분의 1로 줄일 것이며 3년 내 AI 에이전트가 수십억 개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기능이 작동하려면 방대한 화학 라이브러리와 실험 기록, 아미노산과 핵산의 염기서열 등에 대한 빅데이터가 분석돼야 한다. 엄청난 컴퓨팅 파워도 필요하다.
‘고객님’ 모시러 나선 엔비디아,
바이오 AI 기업에도 적극 투자

엔비디아는 이 분야에서 소프트웨어(SW)와 하드웨어(HW)를 두루 공급할 수 있는 회사이다. AI용 그래픽처리장치(GPU) 분야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으며 AI 가속기도 취급한다. 지난해 엔비디아는 전 주기 AI 신약개발 플랫폼 바이오니모(BioNEMO)를 출시했다. 생성형 AI 형태인 바이오니모는 인간의 유전자 단백질 구조와 세포 반응을 학습하고 예측할 수 있다.
엔비디아는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엔비디아는 2023년 리커전파머슈티컬스에 투자했다. 이 회사는 AI 모델과 초고속 실험 설비를 바탕으로 수백, 수천 건의 실험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신약개발 자동화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도 프랑스 회사 큐어51은 희귀암 생존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플랫폼을, 에볼루셔너리스케일은 AI 단백질 설계를 제공한다. 에볼루셔너리스케일은 메타 연구진 출신이 설립한 회사이다. 엔비디아는 자사의 바이오니모 생태계에 이들 기업의 기술력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 마이크로소프트의 에보디프라는 각각 단백질 3차원 구조 예측, 기존 단백질 서열을 바탕으로 한 단백질 생성 등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아마존 AWS 헬스는 신약개발부터 임상, 의료데이터 분석 등 헬스케어 분야 전반을 지원한다. 구글의 알파폴드 개발자인 데미스 허사비스(딥마인드 공동대표)와 존 점퍼(딥마인드 수석연구원)는 AI 기술을 이용해 신약개발, 단백질 기능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의료계의 팔란티어’라 불리는 AI 기반 정밀의료 플랫폼 기업 템퍼스AI(TEM)는 미국 증시의 대표 AI 바이오 기업으로 꼽힌다. 국내에선 암진단 영상 판독 솔루션을 보유한 루닛, 심정지 예측 솔루션 기업 뷰노 등이 알려져 있다.
데이터 부자 빅파마
기득권 여전

글로벌 빅파마들은 이미 자사가 보유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빅테크, 바이오텍과 협업해 신약 발굴에 나서고 있다. 화이자와 일라이 릴리는 오픈AI, AWS를 활용해 신약개발에 나섰다. 모더나는 오픈 AI와 협업해 자체 AI 플랫폼을 개발했다. 사노피는 AI 기술로 항체 치료제를 개발하는 에어렌딜랩스와 이중항체 후보물질 2건에 대한 2조60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국내 바이오 기업 중 사내에 제대로 된 AI 관련 조직을 갖춘 곳은 드물다. 상대적으로 데이터가 부족한 국내 기업들 입장에선 AI 기술 확산이 빅파마와의 격차를 벌리는 악재가 될 수 있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결국 AI를 이용한 신약개발에도 빅파마의 데이터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므로 빅파마로부터 돈을 주고 데이터를 사오든가 하게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정부는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2028년까지 348억원을 투입해 보건복지부·과기정통부 공동으로 K-멜로디(MELLODDY)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웅제약·삼진제약 등 제약사와 병원으로부터 받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목암생명과학연구소·KAIST 등 연구기관이 AI 모델 개발과 약물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있다.
올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발간한 정책 보고서에서는 “데이터 및 AI와 바이오 분야 연구를 융합할 방안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며 “AI를 신약개발에 적용하려면 일관성과 정확성이 담보된 접근 가능한 데이터를 표준화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